6 25 발발 1년만인 1951년 6월24일 유엔주재 소련대표 야코프 말리크가 정전을 제안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럴 수는 없다"며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만큼 분노했다. 한결같은 북진통일론자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27일 참전 16개국은 말리크의 제의를 공동수락했고 7월10일 휴전회담 본회담이 개성에서 시작됐다.
38선 둘러싸고 공방 거듭
1952년 10월8일 옥신각신하던 휴전회담이 포로교환 문제로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은 협상을 서둘렀다. 1952년 11월4일 한국전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가 제3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2월2일 부터 5일 까지 한국을 방문하고 전선시찰 까지 했던 아이젠하워는 휴전을 성사시키는 쪽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38선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만 계속됐다. 이런 가운데 1953년 3월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크렘린의 새 권력자들은 더 이상 스탈린이 저지른 부담스런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3월28일 북한과 중공측은 부상 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동시에 전반적인 포로 문제를 다시 다루자고 제의해 왔다. 휴전회담은 다시 본격화됐다.
이승만은 어떤 식으로건 이를 막아야 한다고 믿었다. 부상 포로 교환협정 조인을 이틀 앞둔 1953년 4월9일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이승만은 중공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할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한 모든 우방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으면 공군-야포와 함포 지원만 해주고 후방에 남아도 좋지만 만일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밝혔다. 다분히 협박성이었다.
이와 관련된 아이젠하워의 반응은 아이젠하워 회고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대통령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 나는 끝으로 우리는 한국이 당면한 제반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지만 만일 한국정부가 미국과 우방들이 지지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라는 경고의 뜻도 첨가하였다. " 마찬가지로 협박성 편지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백선엽, 이형근, 유재흥, 이한림에 이어 마지막 휴전회담 한국 대표였던 최덕신의 수기 "제2의 판문점은 어디에"를 보면 이 무렵 이승만의 입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기는 1953년 4월 중순.
" 군 경비행기를 타고 진해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 뵈었다. 나는 퍽 긴장이 되어 대통령 안색을 살피며 이번에 휴전회담 대표로 나가게 된 최덕신 입니다라고 인사말을 올렸더니 대뜸 무슨 놈의 대표냐? 하는 불쾌한 어조로 반문했다 그래서 예, 저를 휴전회담 대표로 임명한 것은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군 장교입니다. 따라서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한국을 위해 싸워야 하기때문에 국가원수의 지시를 받으러 왔습니다고 처음 생각했던 소신대로 답변했다. "
한 치도 양보안해
사실 그 이전까지 휴전회담 대표중 대통령을 만난 사람은 없었다. 당시 미국측은 한국대표가 이승만과 만나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 그제서야 대통령은 옳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비로소 앉으라고 권하고 그래 자네 말이 옳아, 사실 공평하게 말하면 자네가 수석대표가 되고 자네가 말을 해야 옳지 미국사람이 수석대표가 되는 것은 옳지 않아라고 말문을 열더니 미국사람들이 우리를 제쳐놓고 자기네 마음대로 정전문제를 다룬다는데 대한 불평을 한참 말한 다음, 이런 형편 아래서는 도저히 정전을 할 수 없어. 이것이 항복이지 어디 정전이야? 외국사람들은 평화적인 통일이니 무어니 하지만 공산당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어떻게 평화통일이 있겠는가. (옮긴이 주: 공산당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어떻게 평화통일이란 건가. 라는 뜻)
대강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한 시간 이상이나 그 분 독특한 웅변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분의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심에 감동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이 노애국자의 외로운 모습과 심정을 눈 앞에 보고 이 분을 진심으로 보아드려야 하겠다는 공감과 의무감이 솟구쳐 올랐다. "
이승만은 4월24일 양유찬 주미대사를 시켜 중공군의 북한 잔류허용을 전제로 한 휴전이 성립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 지휘하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아이젠하워에게 통고했다.
휴전협정은 곧 한국군을 유엔군에 편입시킨 1950년 7월17일의 대전협정의 무효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 점은 원칙적으로 정당한 판단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같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전국적인 휴전반대 데모를 선동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미국은 본국에 와 있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4월27일 즉각 한국으로 보내 이승만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완강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며칠 후 이승만은 클라크에게 보낸 한 서한에서 "미국으로 부터 몇가지 확고한 보장을 받기 전에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수에 동의할 수 없다"며 특히 "한만국경선 북쪽에 완충지대를 설치하여 극동에 항구적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유엔군이 관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클라크는 자신의 전쟁 수기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이대통령은 마치 우리가 소련이나 중공 군대를 패배시키기나 한 듯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들 두 나라 지역을 유엔에서 점령하라는 안을 사실상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통령은 우수한 정치가다. 그는 자기의 이 요구가 얼마나 기상천외의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 이런 요구가 유리한 교섭조건을 가져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이미 이승만은 "몇가지 확고한 보장을 받기 전에는"이라는 구절을 보아 미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전쟁 을 시작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클라크의 논평에서 드러나듯이 이승만이 외교교섭을 벌일 때 절대 불리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외교상의 자원들을 자가 생산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외교전략의 기본골격인 셈이다.
"반대는 국민의 뜻"
5월7일 공산군 측은 유엔총회에서 미국의 지지를 얻어 통과된 인도 제안과 유사한 포로송환 문제에 관한 8개항을 제시했다. 일종의 양보이기도 한 이 안에서 공산측은 송환반대 포로들을 중립국에 이송하지 않고 한국 안에 잔류시키는데 동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북한과 중공의 설득 대표단을 비롯해 5개 중립국 송환위원단이 한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5월13일 유엔군측은 동위원회는 송환반대 중국인 포로들의 관리만 맡고 한국인 포로들은 휴전과 동시에 북한이든 남한이든 스스로 결정한 자유를 보장한 채 개인 자격으로 석방해야 한다고 맞섰다.
문제는 미국측이 이런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5월25일 최후통첩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인 포로들도 중국인 포로와 마찬가지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놓은데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이 제안이 모스크바와 북경에 전달되기 1시간 전인 오전 10시 클라크에 의해 아이젠하워의 친서형식으로 전달됐다. 이에 대해 보인 이승만의 반응은 이랬다. "좀 안되었지만 이런 형편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하겠다는 보장을 줄 수 없소. 당신 대통령에게 휴전 반대는 내가 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소원에서 나온 것이라 전해주시오. 내가 설혹 이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말해도 국민들이 듣지않을 것이오. "(클라크 지음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
이런 가운데 공산군 측은 6월4일 유엔군의 5 25제안에 원칙적인 동의를 보였다. 휴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다음날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5월30일 보낸 휴전협정 조인 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안에 대한 답신을 보내왔다.
"한국의 통일은 제2차 대전 중의 제선언이나 유엔이 한국에 관해 발표한 제원칙에 따라 미국이 재삼 약속한 목적입니다. 불행히 한국은 제2차대전 후 분열상태에 놓인 유일한 국가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 미국은 계속해서 모든 분단국가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키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약속을 수행할 결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수단을 전쟁에 의지할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
사실상 이승만의 제안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외교상의 수사로만 가득찬 내용이다. 이승만으로서는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승만의 휴전 반대가 바둑에서 일컫는 일종의 꽃놀이패와 같았다는 점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