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오전 4시 북한은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남침공격을 개시했다. 이날부터 시작해 부산으로 피신하기까지 625 발발 초기 이승만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이승만은 최소한 전쟁이 터진지 4시간 후인 오전 8시까지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같다.



긴급 각의서도 낙관



이날 아침 일찍부터 이승만은 비원의 연못에서 국사를 구상하며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첫보고를 받았는데 그 시각에 대해서는 오전 8시 설과 10시 설등이 혼재한다. 8시 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무려 4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쟁발발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총리서기이며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의 허위보고가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의 환국 직후부터 줄곧 그를 보필했던 황규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연락을 받고 급히 경무대에 들어간 것이 9시30분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승만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일본 동경의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곁에서 신성모가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었다. 당시 이승만에게는 군, 경찰, 미대사관, 스캡 등의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지만 서로 차이가 많아 어떤 것이 정확한 정보인지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승만은 황규면에게 11시까지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토록 지시했다. 이때 이미 소련제 야크 전투기는 서울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예정시간을 지난 11시30분에야 겨우 국무회의는 간담회 형태로 열릴 수 있었다. 최순주 재무장관과 김훈 상공장관 등은 지방출장 중이어서 차관들이 대신 참석했다.


대통령은 회의 서두부터 신성모를 가리키며 "신총리!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상황부터 설명해봐. 정확한 것만 말하게. 정확한 것만"이라고 말했다. 전쟁 전 부터 국군은 모든 준비가 돼 있으며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허위보고를 해온 신성모에 대한 불신감이 담긴 표현이었다. 이에 신성모가 "옛! 각하. 조금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고 말하자 이승만은 "허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걱정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닐세. 정확한 상황을 얘기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면박을 주면서 "신국방은 앉게. 각군 책임자들이 직접 말하는게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별다른 대책이 있을 수 없었고 적의 공습에 대비해 야간 등화관제를 철저히 실시하자는 결론만을 내리고 긴급각료회의는 어이없게 끝나고 말았다. (부산일보사편 임시수도 천일 )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대규모 전쟁으로 생각지 않고 전쟁 전에 흔히 있어오던 무력충돌이 다소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았던 듯하다. 간담회에서 채병덕 참모총장도 적의 전면 남침이라기보다는 남파간첩 이주하-김삼룡을 내놓으라는 움직임 같다고 보고했다. 당시 경무대 비서였던 민복기는 당시 간담회에서 이승만의 심정과 관련해 "대통령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당황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중앙일보편 민족의 증언 1권)


이승만은 이날 밤 앉은 채로 꼬박 새웠다. 26일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불리해지고 있었다. 신성모는 계속 "걱정하실 것 없다"는 보고를 했지만 다른기관의 보고들은 비관적 상황을 알려왔다. 이날 밤에는 소련제 야크기가 서울 상공을 돌면서 중앙청 근처에 기관총 공격을 퍼붓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비롯한 요로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렇다 할 답변을 듣지못한 상태였다. 민복기의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어요. 26일 밤 10시반이라고 생각되는데 대통령이 동경의 맥아더원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맥아더는 잔다고 부관 코트니 휘트니 준장이 전화를 받았나봐요. 대통령께서는 준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맥아더 원수가 깨면 이렇게 전하시오.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 한국에 있는 미국인 2천5백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바로 옆에서 듣고있던 프란체스카 부인은 이박사가 이렇게 하도 어마어마한 말을 하니까 자기 손으로 대통령의 입을 막더군요. 그러나 대통령은 여하튼 맥아더 원수가 깨면 내말을 그대로 전하시오 하면서 끊더군요. "


27일 새벽 1시경 조병옥과 이기붕 서울시장이 경무대로 뛰어들어와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하며 피신을 권유했다. 이승만은 이 말을 듣고 "날 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설득은 프란체스카가 맡았다. 1시간 이상을 설득한 끝에 이승만이 전용 승용차에 오른 것은 새벽 3시반 경이다. 수행원은 비서 황규면,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경호경찰관 4명 등 모두 6명이었다. 그의 피난은 경무대 직원과 신성모 등 고위관리 두세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 문교장관이었던 백낙준 같은 이는 27일 아침 7시 국무회의에 참석하러 경무대에 들어갔다가 이승만의 피난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 



도착 20분 만에 북상



서울역에서 이승만이 탄 특별열차는 기관차 1량에 호남선 운행에 사용되는 3등 완행열차 객차 2량이 전부였다. 열차는 새벽 4시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러나 정확한 행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출발이었다. 황규면은 "가능한 전속력으로 남으로 직행하되 세우라는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 달리라"고 기관사에게 지시했다. 서울역을 벗어나 국민들 몰래 도망쳐야 하는 74세의 노대통령 이승만의 당시 심정은 어땠을까. 어쩌면 청년시절 감옥에서 나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 배 위에서 식민지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조국의 처량한 신세를 가슴아파 할 때와 비슷했는지 모른다.


수원을 지나며 잠깐 졸던 이승만은 갑자기 황규면을 불렀다. "여봐, 황비서. 내가 아무래도 잘못을 저지르는 것같아. " "무슨 말씀이신지 " "아니야. 내가 잘못 판단했어. 서울을 떠나선 안되는데 (차창에 비치는 시골의 한가로운 풍경을 보며) 저거 좀 보게. 얼마나 어질고 순박한 국민들이야? 내가 저들을 버리고 떠나다니 .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프란체스카가 황규면에게 자리를 피하라는 눈짓을 했다. 그래서 황규면이 이승만의 말을 못들은 체하고 돌아서려는데 이승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황비서. 지금 여기가 어디야. " "예 , 대전역을 지나 대구로 달리고 있습니다. " "대구라구? 안되겠어. 차를 세우게. " "예?" "기차를 당장 세우라니까!"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측근들은 "일단 대구에 들러 서울소식을 알아본 뒤 기차를 돌려도 늦지는 않습니다"며 만류했다. 이승만은 일단 "그래? 그것이 좋겠구먼. 대구에 들렀다가 돌리기로 하지"라며 한걸음 물러섰다.


서울을 떠난지 5시간이 지나 대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경북지사 조재천의 "제가 알아본 전황은 아직 괜찮다고 합니다. 서울 북쪽 방어선에서 아군이 적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자 "그렇겠지. 조지사! 기관차를 다시 돌려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게"라고 말했다. 역사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라는 조재천의 권유도 뿌리친 채 이승만 일행을 태우고 온 기차는 20여분만에 다시 북상을 했다.



측근과 승강이 거듭



대전역에서도 대구역과 같은 승강이가 이승만과 측근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승만은 조금이라도 서울 가까운 곳에 가야한다 고 우겼고 측근들은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결국 대전으로 달려온 측근 인사 윤치영이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고 일국의 대통령은 다소 안전한 후방에서 지휘를 해야한다"고 설득해 이승만은 자기 고집을 꺾었다. 이날 밤 충남지사 관사에서 묵게된 이승만에게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찾아와 미국 정부의 전쟁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전했다. 맥아더 휘하 24사단이 한국 전선으로 출동하며 미공군 소속 항공기 3백여대가 참전키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상당히 고무됐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이범석과 윤치영을 개인적으로 불러 "자네들은 부산으로 빨리 내려가게. 지금 중요한 곳이 부산인데 아무도 없어"라며 미군 참전에 따른 사전준비를 맡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미군 참전은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 국방을 외국에 맡긴다는 조치로서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를 갖는 사안이다. 당시 이승만과 무초가 만나는 현장에 있었던 황규면은 이런 증언을 했다.


"무초 대사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투로 이박사께 전쟁은 이제부터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미국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더군요. "(중앙일보편 민족의 증언 1)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