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편 - 큰 별은 외롭게 떨어진다

이승만에 관해서 쓰려면 한이 없다. 매주 2회씩 이승만을 만나 구술을 받아가며 이승만 자서전을 썼던 시인 서정주의 말대로 “그의 일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또 한 사람의 일생 쯤 소비되어도 아까울게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다. 나중에 서점에 깔렸던 그 자서전을 경찰을 시켜 압수했던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이유는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의 이름에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미국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오리지날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이승만이 지었다는 한시(漢詩) 한 수를 감상해보자.

                桃源故舊散如煙 (도원고구 산여연) – 복삿골의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져

                奔走風塵五十年 (분주풍진 오십년) – 어수선히 지나간 오십년이여

                白首歸來桑海變 (백수귀래 상해변) – 모두 변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

                斜向揮淚故祠前 (사향휘루 고사전) – 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뿌리다니

어릴 때 뛰어 놀았었고, 다녔던 서당도 있었고 그의 조상 사당도 있었던 추억의 남산을 보고 읊은 시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이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고국에 돌아오니, 벗들은 간데 없고 흰 머리와 늙고 쇠약해버린 자신이 보여서 눈물이 난다는 시다. 왠지 쓸쓸하고 왠지 눈물겹지 않은가?

그렇게 고집불통이던 이승만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총기는 사라지고 더욱 완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이 다시 쳐들어오니 해군력을 증강하라는 지시까지 내릴 정도였다. 나이도 80을 넘겼고 장관들은 아들 뻘이었다. 그러자 측근들은 ‘인(人)의 장막’을 쳤고 이승만은 이 장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을, 민주당은 조병옥·장면을 내세웠다. 이승만의 인기가 여전한데다가,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미국 육군병원에서 수술 끝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선거의 관심사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아니고 누가 부통령이 되느냐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어서 임기를 못 채울 가능성이 컸고, 그 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하기 때문이었다.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집권당이 바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사력을 다 해 선거에 임했고, 그 때문에 자유당은 사전투표, 유령투표, 반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광범위한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로 7명이 사망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승만은 유효투표의 97%를, 이기붕은 76%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러나 여론은 싸늘했고 부정선거의 증거가 연이어 폭로되면서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산에서 중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 위로 떠 올랐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향했고, 경찰의 발포로 18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4·19 학생의거였다.

인의 장막에 가려있던 이승만은 뒤늦게야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승만은 송요찬 계염사령관을 대동하고 서울대부속병원을 방문, 입원 중인 부상자들을 문병했다. 학생들 상처를 돌보고 이마를 짚으면서 “하루 속히 낫도록 하라”고 위로했다. 학생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는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야. 젊은 학생들은 참 장하다”는 말도 했다.

당시 학생대표로 이승만을 면담했던 유일나의 증언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다… (중략)… 이박사는 놀라는 표정으로 ‘하야라니. 그러면 날더러 물러나라는 얘기냐? 또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으로 가서 살라고?’ 하면서 얼굴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안고 있던 개 해피도 놓쳐버렸다. 나는 ‘국민이 원합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에 이박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체념한 듯 ‘국민이 원해?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이 나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고 되뇌였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온 몸이 땀에 젖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이박사는 ‘알겠다. 잘 왔다.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나도 젊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많은 일을 했었지. 이제 나가서 내가 하야한다고 말해도 되네. 가보게’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승만의 하야에 대한 다른 증언도 있다. 당시 국방장관으로 마지막까지 이승만 곁을 지켰던 김정렬은 회고록에서, ‘이승만은 누구의 압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하야 결단을 내렸다’고 증언한다.

“4월 19일 대대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난 후, 국무위원들은 줄곧 중앙청 내 국무위원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며 사태 수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4월 26일 아침 9시, 시위대가 시청 앞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경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략)… 대통령에게 어제 이기붕 국회의장 집이 습격 당한 것 등을 포함해 상황을 간략히 보고했다. 대통령은 보고를 듣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라는 짤막한 대답을 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해왔다.

그리고는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하고 묻고는 대답을 독촉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무의식 중에 ‘각하, 저희들이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래, 그렇게 하지. 이것을 속히 사람들에게 알리지’ 하고는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내가 부를 터이니 받아 쓰게’ 하더니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냈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원한이 없다. 공산주의에 대하여서는 부단한 주의를 하라’ 는 요지의 (하야) 성명서를 구술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고, 그 소식을 들은 이기붕 가족은 자살했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 사저로 갔다. 가는 길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老) 애국자를 환송했다. 이화장에 있는 이승만에게 각국의 지도자들로부터 위로전화와 격려편지가 쇄도했다. 대만 장개석의 위로편지를 읽은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유당 정부 치안국장이었던 전 국회의원 최치환씨의 증언.

“내가 왜 장 총통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가? 이 편지를 돌려 보내고 싶다. 불의를 보고 방관하지 않는 100만 학도가 있고 국민들이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위로 편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승만은 한 달 정도 이화장에 머물다가 혼란한 정국에서 이승만의 국내 체류를 부담스러워하는 정치세력들 때문에, 2~3주 정도만 피해있을 것으로 믿고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교포들은 이승만이 잠시 머물 것이라는 생각에 침실 2개가 있는 작은 목조 주택인 윌버트 최의 별장으로 모시고 갔다.

이를 흔히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이라고들 말하지만 잘못된 표현이다. 이승만은 망명을 한 적이 없다. 망명은 본인의 망명신청과 상대국의 망명수락을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망명신청을 한 적도 없고, 미국도 망명을 거부하거나 받거나 한 적이 없다.

이승만은 5년 2개월 동안의 하와이 생활에서 돈이 없어 교포들과 미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았다. 체류 막바지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매월 200 달러를 생활비로 보내줄 정도였다. 이승만 부부를 도운 미국인 가운데는, 1920년 말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로 부임하기 위해 몰래 배를 탔을 때,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가도록 도와준 친구 보스윅도 있었다.

이승만은 건강이 나빠져 미 육군병원에 자주 갔다. 혈압 위험 때문에 주변에서는 감정을 건드릴 만한 바깥 세상 문제는 알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마지막까지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그 정권의 성격에 대해 알지 못했다.

2~3주의 예정이 하염 없이 길어지자 이승만은 답답해했고 귀국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이승만의 귀국 열망은 병으로 변했다. 양아들 이인수와의 대화다.

“얘야, 우리나라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

“경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돈이 없어 한국으로 못가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시장을 보고 오면 “어떻게 한국에 돌아가려고 그렇게 물건을 많이 사느냐”고 신경질을 부려, 프란체스카도 시장을 몰래 다녀와야만 했다. 이발비를 아끼려고 머리도 프란체스카가 직접 깎았을 정도였다.

이인수와는 이런 대화도 있었다.

“언제나 내가 우리 땅에 가게 되느냐?”

“한 서너달 지나면 한국이 날씨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는 가시게 될 겁니다”

“내가 전에 가려고 할 때도 석달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아, 그런데 또 서너 달이야 ?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1962년에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여기 데려다 붙잡아 두고 있는가 하는 거야”라며 흥분하기도 하고 “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갈테다”라고 신발을 찾기도 했다.

노인성 치매현상이었다. 한 때 맹수같았던 그가 우리에 갖힌 늙은 동물이 되었으니 병이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측근들은 더 이상 귀국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내에서도 이승만 환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귀국을 달가와하지 않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언론들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는 분위기였다.(우리나라는 언제나 정권이 바뀌면 여야 할 것 없이 전임자를 공격한다.) 그래서 프란체스카 여사 등은 이승만과 의논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는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예정일은 1962년 3월17일.

이승만은 출발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기분이 좋아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출발 직전 서울 정부의 귀국 불허가 통보되었다. 극도로 낙심한 이승만은 그날 이후로는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하와이 각처에서 동정과 호의가 잇따랐고, 하와이 교민들은 한국정부의 처사에 대해 분개했다.

이승만 부부는 독립운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의 주선으로 마우날라니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호스를 입에 문 채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고인의 영구는 7월 21일 오후 고인이 세웠던 한인기독교회 안에 안치되었다. 거구의 한 미국인이 관 앞으로 걸어와 베일을 걷어내고, 이승만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 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1920년 이승만이 상해로 잠입할 때 관을 짜 준 평생친구 보스윅이었다.

이승만의 영구는 다시 하와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진주만의 히컴 공군기지로 갔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두 번이나 졸도해서 운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히컴 기지에서 미군 의장대가 사열하는 가운데 조포가 발사되었고,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이윽고 유해가 C-118 미군 수송기에 실리자, 밴 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16명이 비행기에 올랐다.

7월 23일, 박정희가 영접한 김포공항에 도착한 영구는 빈소인 이화장으로 옮겨졌다. 건국의 아버지이므로 당연히 국장으로 모셔야 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한 등급 낮추어 국민장으로 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의견이 조정되지 못하자 가족장으로 하게 되었다.

7월 27일, 이승만의 영구는 모교인 배재고 학생들이 든 만장 행렬과 함께 그가 다니던 정동 제일감리교회로 옮겨져서 영결예배를 가진 다음, 자동차 편으로 동작동 국군묘지로 향했다. 길거리의 넘치는 사람들 때문에 영구차는 사람이 걷는 속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리고 숭의여고 합창단의 “해 저물어 날 이미 어두우니”라는 조용한 찬송가 소리와 함께 땅에 묻혔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박정희의 조사(弔辭)를 소개한다. 아마 이 조사는 이승만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 중 하나일 것이다.

“조국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으뜸 공신)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고(故) 운남 이승만 박사 영전에 성심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사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의 진세(塵世, 먼지 자욱한 세상) 인연을 끊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범인용부(凡人庸夫, 어리석은 필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개화와 反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革命兒)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 노구(老軀)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 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 속에서도, 만난(萬難)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 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建國人)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金文字)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온갖 노역(勞役)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항일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 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었고, 또 그 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 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의 역사적 발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賢明)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究竟-마지막)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의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 책임으로써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귀국 제일성(第一聲)은 오늘도 오히려 이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사활의 잠언(箴言)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 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해빈(海濱 beach)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영원한 경의로, 그 유택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길지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창군(創軍)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다난(多難)한 앞길을 열어주 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