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 교육개혁과 인재양성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남다른 교육열로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다. 이승만은 1949년에 무상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하고 정부와 민간단체들에 의해 성인을 상대로 한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문맹자 비율이 1948년 80%에서 1959년에는 22.1%로 낮아졌다.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은 3.1배, 대학생은 12배가 증가했다. 그들은 1960~197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훌륭한 숙련공이 되었다. 교육에서 비롯된 남녀평등 사상도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해외로 진출할 국제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한국외국어대학을 세웠고, 전술했듯이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에서 인하공대를 설립했다. 해방 직후 19개에 불과했던 대학이 1960년에는 63개로 늘어났다.

해외 유학 붐도 일어났다.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매년 평균 600 명 이상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유학의 기회를 주었다. 이러한 변화로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들이 양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엘리트 중, 특히 군(軍) 엘리트의 급성장이 단연 돋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군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양과 질에서 모두 급성장한 상태였다. 그 때는 기업이라고 해봐야 몇 명 ~ 몇 십 명의 종업원을 둔 가내 수공업 수준이어서, 수 백 ~ 수 천명으로 구성된 조직을 관리하고 기획해 봤던 유일한 경험집단이 군 장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원조 계획에 따라 매년 1,000 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미군의 선진 군사기술과 조직관리 기법을 배우게 되자, 유능한 장교집단이 형성되었다. 당시 군 장교들의 미국 유학 비율은 어떤 집단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군이야말로 가장 선진적이고 고급의 집단이었다. 이렇게 힘과 실력을 갖춘 장교들 중 최상위 엘리트들은 나중에 넘치는 파워와 경험과 역사관으로 5·16혁명을 일으켜, 수 천년을 숙명처럼 이어왔던 가난을 몰아내고 공업화와 근대화를 선도하게 된다.

정부 안에서도 새로운 테크노크랏들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관청이나 은행에서 말단 직원으로 경험을 쌓다가 해방으로 일본인들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는데, 다시 미국에 단기 연수나 유학을 가서, 미국식 기획․ 관리 제도를 배워온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1950년대에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지주적·유교적 기반을 가졌거나 일본식 교육과 경험을 쌓은 구식 엘리트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통치하는 기간에 구시대의 엘리트를 대체할 새로운 엘리트가 사회 전 분야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6·25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재앙이었다. 인명 피해만 해도 죽거나 행방불명 되거나 다친 한국인은 남북한을 합쳐 400만 명에 이르렀다. 재산 피해액만도 2년간의 국민총생산액을 넘을 정도였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회복시킬 수 없는 규모였다.

그 때문에 미국의 원조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미국원조는 대한민국의 생존에 절대적이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50년대에 정부 예산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86%에 달했다.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57년도에도 53%나 되었다.

여담이지만 6·25가 불행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이 방에서 발제한 적이 있지만, 한국사회에 끼친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모두를 하향 평등화하여 모두를 밑바닥부터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것, 우수한 북한출신 두뇌들이 남한으로 대거 합류하면서 정체되었던 남한 주민들과 자유경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반대로 북한은 대규모 두뇌유출이 되었다), 군인이라는 엘리트 집단을 만들고 그들을 국가발전의 전면에 나서게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자력 기술의 도입이다.

1956년 7월, 미국인 전기 기술자 W.L 시슬러를 만나면서, 이승만은 장래의 에너지는 원자력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1956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곧 문교부 내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고, 몇 년에 걸쳐 100명에 가까운 연구생을 미국에 파견했으며,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고, 원자력연구소도 설립하고 서울대학교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했다. 

특히 미국 원조금 35만 달러에 정부 자금을 보탠 73만 달러로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마크2를 구입하여 설치했고 운영했다. 그들의 기술은 당장 원자력의 에너지화나 무기생산에 활용되지는 못했지만,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해 의학, 농학을 발전시키는 데는 크게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