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 협상의 귀재

이 시리즈 서문에서 나는 “이승만이 미국의 코를 꿰어 한반도 현대사에 집어넣었다”고 표현했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이미 그 예를 많이 들었기에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음을 느끼셨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로 미국을 상대로 한 그의 협상방법, 진정한 속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탁월한 협상전략과 돌파력 역시 당시 국제질서와 그 미래에 대한 이해와 예지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결국 소련은 실패했고 미국은 그에게 질질 끌려 다녔던 것이다.

1949년부터 6·25가 한창이던 1952년까지 주한미국대사로 일했던 존 무초의 이승만 평이다.

“그는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고,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온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아주 고차원적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고,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면서도 꿔준 돈 받는 것처럼 당당했다. 6․25를 거치면서 1954년에는 65만 명의 병력이 정부예산의 40%를 사용할 정도로 군이 급성장했다. 이승만은 이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냈는데, 소련과의 냉전에서 한국이 최전선을 맡고 있었기에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떳떳하게 요구했다. 그가 얼마나 당당하게 요구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부흥부장관을 했던 송인상의 회고록에 있다. 1958년 9월, 송인상이 원조협상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경무대로 이승만을 예방했을 때 이승만은 이런 말을 했다.

“원래 우리 한국인은 남에게 돈 달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그러지 않나.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억울한 이야기를 미국의 조야에 널리 알리게. 38선 얘기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제 나라에서 치러야 했을 전쟁을 우리 땅에서 했으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지 않나.

원조를 좀 더 많이 달라고 해 봐. 그리고 ‘조그만 일에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게.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잘게 굴면 위신이 서지 않아. 하물며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위신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네. 정정당당히 조리 있게 이야기해 봐. 큰 성공이 있기를 바라네.”

미국에서 치룰 전쟁을 한국이 대신 해줬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아마 미·소냉전에 따른 필수불가결한 전쟁을 우리가 맡았다는 뜻이 아닐까), 저 일화는 이승만이 미국의 원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6·25가 끝나면서 한국은 문명의 대전환에 직면했다.

수 천년 동안 대륙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었던 왕래가 단절되면서 한국은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소속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양문명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이 해양문명권의 일부인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중·소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한국·대만을 하나의 지역공동방위체로 묶으려고 했고, 그래서 한국에게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강력하게 권했다. 유난히 일본을 싫어하는 이승만으로서는 미국의 이런 요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렇게 미국이 이승만에게 한·일수교를 압박하던 때인 1954년 7월 말, 즉 6·25가 끝난지 1년이 지났을 때, 제1차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이승만은 미국에 갔다. 그렇지 않아도 이승만은 6·25 때 미국이 북진을 주저하고 휴전을 서두른 것에 대해 불만이 많던 때였다.

미 공군기를 타고 워싱턴 내셔널공항에 도착한 이승만은, 닉슨 부통령 부부가 참석한 공항 환영식에서의 즉석연설에서 마이크를 잡자마자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이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15분 내내 미국의 대한정책을 비판하고는 “우리는 기어이 우리들의 계획을 달성하고야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설 내용은, 이승만이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이며 단순한 떠벌이였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분석이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올리버는, 이승만은 싸우려는 의도를 갖고 미국에 갔다고 해석했다. 즉 한·일수교를 압박하는 미 국무장관이나 미 대통령을 우회하고 직접 미국민들을 상대함으로써,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적인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공항 연설이 아이젠아워에게 전달될 것을 예상하고, 정상회담에서 기선과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부러 강경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발언이 이승만의 협상전략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민이 대단히 존경해마지 않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라는 하원의장의 소개를 받으며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단에 섰다. “미국인들이 한국을 위해 베풀어준 모든 은혜에 감사한다”는 인사말로 시작한 이날 연설은 33회의 박수를 받았다.

이튿날 아이젠아워와의 회담 전, 이승만은 숙소인 호텔에서 미국이 만든 공동성명서 초안을 보았다. 초안에는 “한국은 일본과 우호적으로…” 어쩌구 하는 글이 있었다. 이승만은 읽고 나자마자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호텔방에 앉은 채 회담장에 가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독촉전화가 걸려오고,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이승만은 10분 늦게 백악관에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덜레스 국무장관, 윌슨 국방장관, 브리그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한국에서는 손원일 국방장관, 백두진 경제조정관, 정일권 육참총장, 양유찬 주미대사 등이 배석했다.

회담 첫 의제부터 아이젠아워가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측 대표를 내쫒았던 일을 따지고, 이승만은 그들이 간첩질을 했기에 당연했다고 대답하는 등 날카로운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아이젠하워가 한·일 국교수립의 필요성을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은 “내가 살아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고 대답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가자, 이승만은 그의 등 뒤에 대고 “저런 고얀 놈이 있나” 하고 소리쳤다. 잠시 후 아이젠아워가 화를 식히고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이승만이 “외신기자 클럽에서의 연설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간다.” 하고는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양유찬 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 4억 2000만 불, 경제원조 2억 8000만 불, 도합 7억 불의 원조를 받아냈다.

이승만은 귀국 전, 카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8월 2일 뉴욕 시에서 ‘영웅 행진’이란 카퍼레이드를 받을 때, 숙소인 호텔에서 브로드웨이를 거쳐 뉴욕시청에 이르는 길에 100만 명의 시민이 나와 환영했고, 고층빌딩에서는 색종이가 뿌려지고, 선두에는 3군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했고, 뉴욕시청에 도착해서는 6·25 영웅 밴 플리트 장군이 환영사를 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대환영이었는데, 이런 성대한 환영식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용감하게 맞선 한국의 노영웅에 대한 미국민의 감사 표시였을 것이다.

이상의 일화는, 비록 작고 힘 없는 나라에서 온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에게조차 당당하면서도 협상에서도 성과를 거둘 줄 아는 협상의 고수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닉슨은 중국과 수교하여 소련을 고립시켰던 위대한 전략가이다. 1953년 6·25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닉슨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의 궁전에 갔었다. 닉슨은 수도 자카르타가 엉망으로 더렵혀진 모습을 보고는 “수카르노는 독립전쟁 때는 영웅이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일기에 썼다. 캄보디아의 국왕 시아누크를 만나고는 “정치엔 무관심하고 음악 얘기만 한다, 희망이 없다”고 썼고, 고원 별장을 천국처럼 꾸며놓은 베트남 국왕 바오다이를 만나고는 “국사에는 무관심하고 개인이익만 챙긴다”고 썼다.

닉슨은 이어 한국에 들렀다.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과 합의 없이 북진해선 안된다는 보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친서에는 “한국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휴전하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면서 북진통일을 외치고 휴전을 반대했던 이승만이 정말로 단독으로 북진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북진에 대한 닉슨의 거듭된 우려와 반대에 이승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지도자가 미국의 명령에 복종만 한다는 사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미국은 공산주의와 대항하는 가장 큰 수단을 잃을 것이다. 이승만과 한국이 어느 쪽으로 튈지 알 수 없고, ‘이승만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란 것을 보여줘야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할 수 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그런 불안감을 없애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미국을 도와주는 일이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승만이 비록 북진통일과 휴전반대를 그렇게도 외쳤지만 모두가 협상전략이었을 뿐, 내심은 단독북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닉슨은 이승만의 용기와 지적능력에 감동을 받았다고 일기에 썼다. 닉슨은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면서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그 노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사후에 알게 됐다”고 썼다. 공산주의자와 싸울 때는 “카드를 먼저 보여줘선 안 되며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해야 함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닉슨은 회고록에서도,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주지하시다시피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반감은 대단했다.

일본 얘기만 나오면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6·25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위기에 처했던 1951년 초, 미국은 일본군을 유엔군에 편입시켜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검토했었다. 이승만은 노발대발하면서 “만약 일본군이 참전하면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진면목은 그가 맹목적인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 총독부 관료 출신으로 친일파로 몰렸던 임문환의 회고다.

1951년 초, 이승만은 임문환를 농림부장관에 임명했고, 임문환은 역시 친일파였던 일본 고등문관 시험 동기 이태용을 차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친일파라며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문환을 불러 이런 대화를 했다.

“군(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했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이태용(李泰鎔)은 성명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 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이승만이 이어 말했다.

“일제가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 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일본은)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친일파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자중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군(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놀라운 일화다.

일본과는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던 이승만이었다. 6·25 때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일본군이 참전하면 먼저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리겠다고 말했던 이승만이었다. 나중의 일이었지만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권고하던 아이젠아워에게 “고얀 놈”이라고 호통치던 이승만이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면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던 이승만이었다. 일본 얘기만 나오면 얼굴 근육이 실룩이던 이승만이었다.

그런 이승만이 “개인적인 대일 적개심은 이미 잊었다는 것, 일본은 미국에 붙어 번영하고 다시 한국에 온다는 것, 그 때 친일파들이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련은 붕괴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승만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긍정적인 면에서) 협상의 귀재였던 것이다. 물론 일본의 부흥과 소련의 붕괴를 예언한 것도 모두 맞았음을 우리는 안다.

일본의 6·25참전 얘기가 나온 김에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바로 장개석 자유중국(대만)군의 6·25참전도 이승만이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1953년 초, 대만군의 참전 가능성이 논의되자, 이승만은 또 다시 펄펄 뛰면서 반대했다. 이승만에게 있어, 중국은 한국을 오랫동안 지배함으로써 한국의 발전을 가로 막고,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10여 년 동안 원세개의 지배 때문에 한국이 개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해방 직후 정부가 없는 혼란기에 화교들이 암거래, 밀수, 불법통화 거래 같은 비리를 저지른 데 대해 이승만은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공산주의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데 대해서는 협조했다. 그래서 1949년 8월에는 장개석을 초청하고 1953년 11월에는 그 자신이 대만을 방문했다. 이 일화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철저하게 현실적인 이승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방 전후에 걸친 이승만의 수많은 선택, 반공포로 석방, 위에 언급한 협상사례와 그의 진정한 속셈 등을 유추해보면, 이승만은 미국 등을 상대로 말 그대로 벼랑끝 전술을 펼쳤고, 그 때마다 승리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김정일의 벼랑끝 전술은 이승만에게 배운 듯 하다.) 더구나 이승만은 결국 협상 상대방까지도 자신을 존경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