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 농지개혁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위대한 업적 중 절대 뺄 수 없는 업적이다.

토지개혁은 원래가 어렵다.

필리핀이나 중남미 여러 국가에서 소수의 대지주 가문은 방대한 토지를 대물림하며 초호화 생활을 하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소작농으로 살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멕시코는 1821년 독립 후 지금까지 3차례나 큰 토지개혁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가난을 못 이겨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백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아니 대한민국은 단칼에 성공했다.

그 전까지 우리 농촌사회는 지주제의 지배 하에 있었다.

대지주가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 주고 수확의 절반을 지대로 수취했고, 전체 농가의 75%가 소작농이었다.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수확의 절반을 바치면서도 소작지를 떼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 사실상의 농노였다. 이런 약탈적 토지 이용관계를 그냥 두면, 지주와 소작농은 숙명처럼 대물림하여,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적인 국민의 성립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제도를 실질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획기적인 조치가 있어야만 했다. 농지를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은 시대적 당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았지만 국회는 야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민당을 비롯한 국회의원의 대다수가 지주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 때문에 농지개혁 법안은 수정을 거듭하다가 6·25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가서야 겨우 확정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는 용인술을 펼쳐 농지개혁법을 밀어부쳤다.

좌익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대지주의 농지를 몰수하여 농부에게 대가없이 나누어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주장하고 있었다. 김구의 한독당도 찬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한식 농지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의 노예에서 정부의 노예로 바뀔 뿐”이라며 반대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농지를 잃은 지주에게도 적정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유상수용 유상분배의 원칙을 주장했다.

유상수용 유상분배는 자유민주자본주의의 핵심 원리인 사유재산 존중의 정신이다. 이는 북한의 무상수용 무상분배와 대비되는데, 그 효과의 차이는 이후 남북의 발전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사실 “북한은 토지를 무상수용했다”라는 말조차 관대한 표현이다. 지주들을 내쫒고 처형했기에 무상몰수 그 이상이었다. “무상분배”라는 표현도 옳지 않다. 무상분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뺏은 농지와 토지가 모두 집단농장화 되어, 개인은 매매, 대여, 저당 등의 재산권을 전혀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의 토지개혁(농지 포함)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오직 무상몰수만 있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당초 1949년 3월 국회에 상정된 개혁법에서는, 농지소유 상한을 3 ha로 정하고 그 이상의 농지는 지주로부터 유상으로 수용하여 소작농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되, 농민이 부담할 지가의 상환액은 평년 수확가의 300% 로 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압력을 가하여 농민 부담 상환액을 150%로 낮춰 국회를 통과시켰다.

(아마 이승만이 국회에서 소수파임에도 불구하고 집권기간 동안 내내 국민들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농지개혁일 것이다. 이런 상황인식이 나중에 부산정치파동으로 나타나 이승만으로 하여금 대통령직선제를 밀어부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매년 생산량의 일정률을 지가상환액으로 정부에 납부하면, 정부는 그 액수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종전 지주에게 지급하여, 정부가 접수한 일본인 공장들을 지가증권으로 불하받을 수 있도록 했다. 국유화했던 일본인 재산을 민영화하는 데에 지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에 발발한 6.25로 인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지가증권의 가치는 크게 떨어졌고,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보다 훨씬 할인해서 팔아 생활해야 했다. 토지자본이 부스러기처럼 흩어져서 정부가 의도한 산업자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만은 산업자본화에 성공하여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화로 가게 되었다.) 

더 이상의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지주가 아닌 제3자도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구입하여 기업체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하자, 신흥 기업가들이 새로이 등장하기도 했다. 삼양사 김연수, 두산 박두병, 선경 최종건, 한국화약 김종희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비율은 토지자본의 일부에 불과했다. 

농지개혁을 시행하니 1950년대의 한국사회 구조가 혁명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주제가 소멸되고 전 경지의 92.4%가 자작지로 바뀌었다.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농지를 팔고 자기의 원래 신분을 모르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서 새로 농지를 구입함으로써, 꿈에 그리던 일가를 창립하고 독립자영농으로 새출발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져 농업생산력도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

양반과 상민, 지주와 소작인으로 구별하는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역사상 최초로 사민평등의 시대가 찾아왔다.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우리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이 없는 균질사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시장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으며,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은 효과도 있었다.

농지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되기도 전에 이승만은 행정명령으로 농지분배에 박차를 가했는데, 그 바람에 법안 통과 전에도 실질적으로는 농지개혁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법안 통과 당시에는 대상 농지의 7~8할이 이미 분배된 상태였다. 법안 통과 후 3개월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지만, 이미 그 전인 3월부터 ‘분배농지예정통지서’를 농민들에게 발급해줬기 때문에, 농민들은 농지 소유주가 된다는 기쁨과 함께 “저 농지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인데도, 농민들은 소유권 없이 경작권만 주는 북한식의 토지개혁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농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았고 대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6·25 중에 북한군에 동조하는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하면 남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북한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는데,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이를 막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