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1)

이쯤 해서 이승만의 잘못이라고 알려진 문제들도 살펴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놀고 먹다가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았고, 그 과정에서 좌우합작을 거부하여 조국을 분단시켰다”는 비난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그것은 악의적 모함이며, 오히려 집권과정에서 이승만은 사사건건 미국의 방해를 받았고, 사실상 단 한 번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일견 미국이 그를 지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도, 사실은 미국이 결국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됨으로써 그렇게 보이는 것임도 밝혔다. 그가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미국의 코를 꿰어 한반도 현대사에 집어넣었다는 것도 밝혔다.

또 무엇이 있을까?

“친일파 청산 거부로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다, 6·25 발발 직후 거짓방송을 하고 먼저 도망갔다, 한강 다리를 조기에 폭파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집단살인을 했다,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했다, 3·15부정선거를 했다”는 정도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이론이 많고 사정이 복잡한데다가 나 자신의 지식과 지면의 한계 등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간단히 평가해보겠다.

먼저 친일파 청산 거부.

해방후 미군정이 3년간 있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친일파 문제는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시 불안했던 치안의 유지가 우선이었던 미군은 일제 하의 경찰들을 그대로 썼다. 그래서 당시 경찰의 절반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재적 141, 찬성103, 반대 6인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고, 이승만에 의해 법률로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1949년 1월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그 결과 8월까지 특검에 송치된 자가 599명, 기소된 자가 221명, 재판이 종결된 자가 38명이었다. 재판에서 체형 12명, 공민권 정지 18명, 무죄 내지 형면제가 8명이 있었는데, 체형은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기타 징역 1년 ~ 2년 6개월, 집행유예 등이었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2 명도 곧이어 6·25가 발생하여 석방되었다. 즉 반민특위가 제대로 처벌한 친일파는 1 명도 없었다.

당시 좌익세력은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을 썼고 이게 먹히고 있었다.(요즘도 그런데 당시에야 말 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경찰들은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민특위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세력은, 정도의 차가 있을망정 친일 경력자가 다수 포진해 있던 경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동료가 체포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고, 심지어 반민특위의 사람들이나 재판관들조차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너나 나나 똑같은데, 누가 누구를 재판하느냐” 란 말이 수사 과정이나 재판정에서도 나왔다.

여러 명의 경찰들이 체포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를 체포하고 고문한 노덕술을 들 수 있다. 군대보다 막강했다는 당시 경찰집단이 똘똥 뭉쳐 반격에 나섰다. 서울시경 국장 지휘 하에 경찰부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요원들을 폭행하고 연행하는, 공권력에 의한 백주의 테러(6·6반민특위 습격사건)가 발생했다.

그러다가 5월 국회프락치 사건, 6월 김구암살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되더니, “1949.8.31까지만 반민특위가 활동한다”는 곽상훈의 특별법개정안이 통과되어, 결국 8월 31일 반민특위는 해산되었다. (강제로 해산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만은 사실상 경찰의 불법행위를 묵인했다.

이승만은 “좌익분자들이 살인방화 등 지하공작을 하고 있어 경험있는 경관의 기술이 필요한데, 마구 잡아들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담화문도 발표했고, 이에 맞서 국회는 성명서를 내면서 반발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왜 실패했을까?

먼저 친일파 청산세력의 힘이 그 반대세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보잘 것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임시정부를 따라 온 광복군의 수는 300 명도 안 되었고, 그나마 흩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해방 자체도 미·일 간 전쟁의 결과로 일본 제국주의가 해체됨으로써 이뤄진 것이었고, 대한민국의 성립도 크게 보면 미국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적 제약 속에서 친일파를 엄단할 권위와 물리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수 십 명 뿐인 반민특위의 인원으로는 수만 명의 경찰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의지가 있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경찰 편을 들어줬다. 이승만으로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친일청산을 추진하는 것이 더 없이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경찰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권력욕 때문이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자.

엉성하게 나라를 세운지 1년도 되지 않아 행정력, 군사력, 경제력은 걸음마 단계였고, 전국 곳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골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며, 무식하고 감정적인 국민들은 이리 저리 휩쓸리며 몰려다닐 때였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정부의 실무관료(테크노크랏)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보기에 민족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질없는 분열과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 이승만은 자칫하면 경찰력과 행정력과 군사력까지 와해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4·3사건에 의한 공산당의 폭동이, 여수·순천에서는 남로당이 일으킨 군대 반란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휴전선에서는 끊임 없이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었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남침준비가 한창이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경제적 상황도 악화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도 베이징과 난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함락되었고, 소련 점령 하의 동구에서는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지만 많은 나라가 사회주의 정부로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을 오직 이승만만이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보기에 잘못 하다가는 아기와 같이 연약한 나라가 자라기도 전에 살해될 판이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종합적 판단의 결과로 그는 반민특위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가 구성한 초대 내각에 2~3 명의 친일파가 포함되었다는 여론이 일었을 때도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일제 때 드러내놓고 친일했던 사람들, 즉 영혼까지 팔아 친일했던 이들이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참여하거나 주요 요직에 참여한 사례는 없다. 있다고 주장한다면 증거를 제시하시기 바란다.)

이제, 7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봐도, 나는 당시 이승만의 관찰과 결단이 옳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반민특위가 성공했다면, 친일파들을 일거에 처단하여 일시적으로 국민들 속은 시원해졌을지 몰라도, 그 후유증과 혼란을 감안할 때, 분명히 대한민국은 그 이듬해 발생한 6·25로 인해 살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시 시대상황은 가슴이 후련한 상태로 죽느냐, 아니면 가슴이 답답해도 살아남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였고, 이승만은 눈 딱 감고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명분이 아닌 실리를 택했던 것이다. (이런 프레임은 나머지 이승만의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모든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나중에 해방 후의 혼란 상황을 연표 형태로 제시하겠다.) 거의 혼자 하다시피했던 이승만의 그 탁월한 선택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70년 후의 우리는, 이런 이승만의 고민과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

솔직히 까놓고 물어보자.

이승만이 그 반대를 선택했다면 그 이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는 지금보다 행복할까?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