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2)

다음은 6·25 때 혼자 도망갔다는 비난과 서울사수 거짓 방송.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이승만은, 서울이 곧 함락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안심하라”고 방송하고 나서, 자신은 대구로 내뺐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심지어 미리 방송을 녹음해 놓고 도망갔다는 비난도 받는다. 이건 어디까지 사실일까? 당시 상황을 보자. (알아보니 참으로 많은 설들이 있어 어느게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정리해보겠다.)

북한의 남침시각은 1950.6.25 새벽 5시였다. 국방부는 늘 있던 군사충돌이 조금 심각한 정도라고 판단하고 오랫동안 보고하지 않았다. “문제 없다”는 식의 보고만 올리고, 서울시민들에게도 “걱정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까지 했다. 이런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판단과 보고는 이날 오전 11시 30분 국무회의 시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마도 대통령을 안심시키려는 마음이 앞섰거나 아니면 제대로 상황파악을 한 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만큼 당시 국방부는 엉망이었다.

이승만에게는 경무대 김장흥 총경이 첫 보고를 했는데(신성모 국방장관이 첫 보고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점은 8시 설, 10시 설, 10시 30분 설 등이 있다. 비서 황규면이 9시 30분에 급히 경무대에 불려갔을 때, 이승만은 화난 얼굴로 동경의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신성모가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었다고 한다.

소련제 야크전투기가 서울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11시 30분에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승만은 두루뭉수리 보고하는 신성모에게 “정확한 것만 말하라. 정확한 것만”이라고 주문했지만, 신성모는 “각하. 조금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고만 되풀이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면남침이라기보다는 남파간첩 이주하, 김삼룡을 내놓으라는 움직임 같다”고 보고했다. 국군이 판판히 깨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누구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보고만 올라오니, 이승만도 흔히 있던 무력충돌이 다소 크게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대통령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당황해하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는 당시 경무대 비서 민복기(후에 대법원장)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이승만은 이날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웠다. 26일이 되자 전황은 더욱 불리해지고 있었지만, 신성모는 계속 “걱정하실 것 없다”는 보고를 했다. 그러나 다른 기관들의 보고는 비관적이었다.

이승만이 전면전임을 안 것은 26일 새벽 3시 경이었다. 이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증언을 위주로 쓴다.

이승만은 동경의 맥아더에게 전화를 했지만 부관 코트니 휘트니 준장이 전화를 받으며 맥아더가 깨면 전하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프란체스카가 너무 놀라 수화기를 막을 정도였다. 휘트니 준장도 미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맥아더를 깨워 바꿔주었다.

(또 다른 목격자 민복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은 “빨리 도와주지 않으면 남한에 있는 2,500 명의 미국인을 우리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며, 놀란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고 한다. 영어는 프란체스카가 더 잘했을 것이므로 일단 그녀의 증언을 싣는다. 다만 기억력과 상황판단은 민복기가 더 나을 것이라고 보이므로 어느게 사실인지는 미지수다.)  

이승만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무스탕 10 대를 보내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이에 국방부 관계자들은 또 무스탕기가 있으면 북괴를 막아낼 수 있다면서 대통령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

맥아더와의 통화가 끝나자 이승만은 워싱턴의 장면 대사를 불러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 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러자 국방부는 2~3일 안에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상 프란체스카 증언) 이날 밤에는 소련제 야크기가 중앙청 근처에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다.

27일 새벽 1시경 조병옥·이기붕이 경무대로 뛰어들어와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하며 피신을 권했다. 이승만은 “날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며 거절했다. 결국 프란체스카 여사가 1시간 이상 설득한 끝에 이승만이 승용차에 오른 것은 의정부가 뚫린 새벽 3시 반 경이었다. “걱정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던 6월 25일의 방송을 피난방송으로 바꿀 경황도 행정적 여력도 없었다.

열차는 행선지도 정하지 못한 채 새벽 4시에 서울역을 출발했다. 수원을 지날 때 잠깐 졸던 이승만이 황규면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 판단했어. 서울을 떠나선 안되는데, (차창에 비치는 시골 풍경을 보며) 저거 좀 보게. 얼마나 어질고 순박한 국민들이야? 내가 저들을 버리고 떠나다니” 하고 한탄했다. 대전을 지나 대구로 가고 있는 것을 안 이승만은 “차를 세워라. 기차를 당장 세우라!”고 소리쳤지만, 측근들은 “일단 대구에 들러 상황을 알아본 뒤 기차를 돌려도 늦지 않는다”며 만류했고, 이승만은 그러기로 했다.

대구역에서 경북지사 조재천이 “제가 알아보니 서울 북쪽 방어선에서 아군이 적을 막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고하자, 이승만은 ”그렇겠지. 조지사, 기관차를 다시 돌려 올라갈 수 있도록 해라”고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 조재천의 권유를 뿌리치고 기차는 20 여분만에 다시 북상했지만, 대전역에서도 비슷한 승강이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조금이라도 서울 가까운 곳에 가야 한다고 우겼고 측근들은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결국 대전으로 달려온 윤치영이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고, 대통령은 안전한 후방에서 지휘를 해야한다”고 설득해 이승만은 고집을 꺾었다.

이날(6월 27일) 오후 7시경, 충남지사 관사에 있던 이승만에게 무초 주한미대사가 와서 “맥아더 휘하 24사단이 한국으로 출동하고, 항공기 3백여 대가 참전키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이승만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승만은 이범석과 윤치영을 불러 “부산으로 내려가 미군 참전에 따른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는 처음으로 대국민 방송을 지시했다. 3일 동안 자기 신변만 챙기고 국민들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게 미국 참전을 알려 국민들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철원 공보처장이 서울 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당직 아나운서를 대기시켰고, 이승만은 방송원고를 구술하면서 황규면에게 받아쓰게 했다. 방송은 그날 밤 10시에 내보내야 했으므로 다시 정서할 겨를도 없었다.

이승만이 구술한 내용은 대강 “UN에서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기·군물을 날라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취지였다. 이승만은 즉시 전화 수화기에 대고 구술한 원고를 읽었다. 이것이 그날 밤에 나간 대통령의 녹음방송이다.(이상 황규면 증언)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방송은 오히려 전쟁 초기의 혼란을 부추김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상이 내가 정리한 내용인데, 이를 자세히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전쟁 초기에 이승만은(아니 그 누구도) 전면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국방장관 등이 계속 허위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전면전이며 국군이 곳곳에서 패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국방부만 탓할 상황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만약 정확한 상황판단과 보고가 있었다면 이승만은 보다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적절한 시점을 택해 피난을 갔을 것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상황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이승만은 측근들의 독촉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결과적으로 조금만 늦었으면 대통령이 포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빨리 도망간 것은 아니다. 이승만이 기차를 탈 때는 의정부가 뚫린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황망한 와중에서도 맥아더를 위협하는 등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

또한 피난을 가면서도 이승만은 내내 국민들에게 미안해 했다. 그래서 측근들과 실랑이를 많이 벌였고, 대구 도착 20분만에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8월 14일,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최악의 경우 남한이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며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이승만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냈고 무초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이승만은 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무초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프란체스카 증언)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승만은 미리 방송녹음을 하지 않았으며 거의 즉석연설로 방송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방송도 UN의 참전을 알려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목적이었다. 그러나 선의에서 한 방송이라 하더라도, 불과 4시간 후에 서울이 떨어지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하여 적이 패주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황규면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이 구술한 방송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승만의 육성방송에 이어 국방부에서 그런 내용을 추가로 방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1969년 경희대 대학원장이던 이선근이 경희대 정치학 석사과정 강의 도중에 고백한 내용이라며, “6·25 때 육본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이 국민과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울을 사수한다는 초기 녹음을 계속 틀었던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이선근은 자신으로 인해 ‘어른이 욕 잡수시게 해 드린 것’이라는 증언도 했다고 한다.

적이 패주하고 있다고 거짓말 방송을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비록 이승만이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거짓방송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이승만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책임은 상당량 경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이승만이 뒤집어 쓰기에는 여러가지 정황증거 상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이승만이 먼저 피난 간 것도 따져보자.

그 자체가 헌법기관인 대통령은 전쟁이 나면 무조건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아마 지금은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만약 이승만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면 그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아마 “등신같이 포로가 된 이승만 때문에 나라가 공산화됐다”는 비난이 영원히 그에게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래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반문하고 싶다. “그럼 대통령이 포로가 되었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셋째, 한강교 폭파에 책임져야 한다는 비난에 대해 말해보자.

한강교 폭파는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중앙방송국이 이승만의 방송을 내보낸 후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던 시각과 거의 같은 시각에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지적되고 있는 한강교 폭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폭파시점이 너무 빨랐다 는 것이다.

문산과 파주 쪽에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수색 쪽으로 다가서면서 그 중 일부가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넘어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명령한 다음 시흥으로 갔다.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당시 한강교 폭파와 관련된 지휘계통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국방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 등으로 이어진다. 한강교 폭파는 결국 결정적 오판으로 판정돼 최창식 대령은 체포됐고, 1950.9.21 사형선고와 함께 같은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분히 정치적 희생양에 가까웠다. 참고로 최창식 대령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64년 무죄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대부분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그래서 국군의 재편이 곤란해졌다. 또한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지 못해 적 치하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폭파를 하는 바람에 수백명의 희생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한국전쟁사’ 제1권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한강인도교 폭파로 한수(漢水) 이북에서 싸우고 있던 장병들 가운데 4만 4천 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7사단의 경우 (약 1만 명 가운데) 장병 5백 명과 기관총 4정만 도강할 수 있었다. 1사단은 5천 명만 도강하고 각종 대포는 유기되었다. 제2, 3, 5사단 역시 흩어진 채 도강하였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군작전을 신뢰하다가 피난길이 막히게 된 정부 요원들과 시민들은 학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지 않으면 안되었고, 미처 반출하지 못한 정부 재산은 적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

“버려진 군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것은 부상자들이었다. 6월 24일 현재 서울시내 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는 약 1,300 명이었다. 여기에다가 3일간의 전투에서 다친 3,200 명의 군인들은 서울대학 부속병원 등 민간병원에도 분산되었다. 서울대학병원은 1개 소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서울대학병원에선 움직일 수 있는 전상자 80여 명이 한 장교의 지휘 하에 뒷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남아 있던 전상자들은 인민군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나는 한강교 폭파 시점이 전략·전술적으로 옳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이승만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군부의 군사적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서울시민들을 인질로 만들어 놓고,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폭파했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 한강교는, 비록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해도, 온전히 군사전략 또는 군사전술의 일환으로서 폭파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대통령이 책임을 모두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서울사수 방송”과 마찬가지로, 한강교 폭파 책임을 이승만에게 모두 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있는 이승만의 책임 역시 상당량 경감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