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임시정부, 미국정부, 재미동포와의 끝없는 갈등

[내가 이 글을 쓰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과 죽이 잘 맞아 서로 짝짜쿵해서 이승만이 집권했다는, 그야말로 사실과는 정반대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믿는 주변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얼마 전 이 방에서도 그런 주장을 펼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당초에는 이승만과 미국정부, 이승만과 한국인들(재미교포 및 임시정부)과의 갈등사례 위주의 글만 써서 반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주변의 갈등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갈등부분만 골라 따로 적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내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글에서도 상당한 갈등이 기술되었지만, 이제부터 당분간은 미국을 포함한 주변과의 갈등사례를 중심으로 써 보겠다.

오늘이 노동절이다. 갑자기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갔을 때, 노동절을 맞아 북한군의 사열을 받았던 장면이 떠 오른다. 이 내용은 나중에 쓸 것이다.]

해방 이후 나라집 세우기 과정과 6·25 과정도 마찬가지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 시절은 미국정부, 재미동포, 임시정부와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정부, 재미동포, 임시정부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좌우합작 불가’ 신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와의 갈등에는 미국의 전략에 대한 이승만의 반발이 더해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 3그룹과의 갈등은 주로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본능적인 거부 때문에 발생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승만은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이 장에서는 그 때문에 이승만이 얼마나 많은 그룹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었는지를 살펴보자.

3.1운동 직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발족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의 노령임시정부(3월21일), 중국 상해임시정부(4월 11일), 한국 한성임시정부(4월23일)가 그것이다.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도 있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와 신한민국정부도 발족됐으나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승만은, 노령임정에서는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에 이어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상해임정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없는 사실상의 수반인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며, 한성임정에서도 사실상 최고자리인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모두 이승만이 미국에 있을 때였기에 이승만 자신도 추대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만큼 벌써부터 그의 이름값은 컸다. (이는 해방 후 여운형·박헌영이 주도했던 ‘조선인민공화국’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한민당’에서도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승만이 모두 거부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임정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왜냐하면 다른 임정에 비해 한성임정은 1919년 4월 16일∼23일에 전국 각지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국민대회를 여는 등 정당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고, 탄탄한 조직을 가진것으로 알려져 있고,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됐으며, 주로 이규갑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그 배후에는 이승만을 아들처럼 아끼던 이상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상해에서는 3개의 임정을 통합하자는 운동이 벌어져,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한성임정 조직을 중추로 해서 상해임정과 노령임정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졌다. 임시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임명되었다. 박용만은 외무총장이 되었지만 이승만과는 일하지 않겠다며 취임을 거절했다.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에, 김구는 경무국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각료 선정에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안창호가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1919년 11월에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상해에 오면서 통합임시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이승만은 상해와의 전문을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어렵게 출발한 통합임정은 온갖 분파들의 정쟁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기호파와 서북(평안도)파, 무력투쟁론과 외교투쟁론, 미국중심과 중·러중심,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노장파와 소장파 등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반목을 일삼았다.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용만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아예 북경으로 가서 반임정투쟁을 벌였다. 통합과정에서 법통은 한성정부를 이어받고 임정 위치는 상해로 정해진 데 반발해, 노령임정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임시대통령이 현지로 부임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게 일자, 이승만은 비서인 임병직과 함께 상해에 가기로 했다.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려 있어 비밀을 유지해야 했기에, 하와이에서 두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배를 찾기 위해 미국인 친구 윌리엄 보스윅의 별장에서 한 달 이상을 보냈다. 당시 하와이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는 거의 모두가 일본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1920년 11월 15일 저녁, 두 사람은 보스윅의 도움으로 배표도 없이, 중국 직행 선박이자 중국인 노무자들의 시체를 싣고 상해로 가는 배(웨스트 하이카호)에 올랐다. 사전에 보스윅과 선장 사이에 몰래 태워도 좋다는 양해가 있었다. 이승만은 갑판 아래 시신창고에 숨어들었는데,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다가 시체 썪는 냄새까지 지독했다.

배가 항구를 멀리 벗어난 다음 날 늦은 밤에야 두 사람은 선장에게 갔다. 선장은 모르는 척하고 야단을 친 다음, 무임승선을 대신해서 노동을 명령했다. 젊은 임병직은 갑판청소를, 나이 든 이승만은 하루 4시간씩 망 보는 일을 맡았다. 배는 마닐라를 거처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일본 경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 속에 끼어 통나무를 메고 육지에 상륙했다.

1920년 12월 28일부터 5개월간 이승만은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무를 했다. 임정은 재정적으로도 궁핍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이념 등으로 갈라져 격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어 이승만은 매우 힘들어 했다. 무력투쟁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 이동휘와 신채호의 비난, 비호의적인 안창호의 평안도 세력, 게다가 이승만을 살해하기 위해 김원봉의 의열단이 파견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신채호는 1차대전 종전 후의 질서를 정하는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글 몇 줄 적은 문서를 제출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주장이었다. 안창호는 상해에서 서북지방 출신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미국에서는 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컸다.

함경도 출신의 공산주의자로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여야 한다, 임정을 시베리아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 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이승만 퇴진운동도 벌였다.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내놓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학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도 연달아 사퇴했다. 그러자 임정세력들은 이번에는 이승만의 포용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군중대회를 열고, 미국에 의존하려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이 “독립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마저 무장투쟁론이 우세했다. 애초에 상해에는 일체의 조직이 없었던 이승만으로서는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박용만·신채호 등 무장투쟁파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위임통치 청원문제(3·1운동 전인 2월 25일, 정한경·이승만이 조선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던 일)로 이승만을 규탄하고는 상해임정도 부인했다. 그리고 상해 의정원을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새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안했다.

이들은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국내외 61개 단체가 참석해 국민대표회를 열지만, 좌익과 우익, 좌익 내 고려공산당과 전러공산당 등이 갈등을 빚다가 안창호계는 탈퇴하고, 급진파만으로 조선공화국을 선포한다.

이승만이 보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지나칠 정도로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명분과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직도 없는데다가 미국식 자유주의적·실용주의적 풍토에서 교육받고 미국적 가치와 생활방식을 체득한 이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상해 임정은 파탄을 향해 달려갔고 이승만은 진저리를 쳤다.

이승만은 더 이상 상해에 있을 필요를 못 느꼈다. 마침 미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가 태평양 지역 9개국에게 해군 군비축소회담을 제의하자, 이승만은 9개국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해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상해에서 조직이 없어서 받았던 고통스러웠던 경험의 산물이었다.

극에 달했던 내분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고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상해임정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비난이 비등해졌다. 그래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토의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17일, 17명의 참석의원 중 반대의원 5명이 퇴장한 가운데 12대 0으로 불신임안은 가결되었고,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임정에는 불신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승만은 상해로 보내던 하와이교민단의 인구세를 더 이상 보내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이에 임정은 이승만에게 불법적 행위를 중지하라고 경고했고, 이에 맞서 이승만은 “극동에 있는 교민들로부터는 한 푼도 걷지 못하면서, 미주교민에 대해서만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그동안은 자신이 임정대통령이니까 미주동포의 돈이 상해로 간 것이지, 자신을 쫓아내면 더 이상 미주동포의 돈이 상해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마침내 임정은 1924년 가을, 이승만에게 면직결정을 통보하고 불복하는 경우에는 2개월 내에 제소하라고 통고했다. 5년 6개월에 걸친 이승만의 상해임정 대통령 시절은 이렇게 파국으로 끝났다.

2차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다가오자 1945년 2월, 미국 대통령 F.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소련 최고인민위원 요시프 스탈린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크림반도 얄타에서 종전 후의 대책을 합의하였다. 이른바 얄타회담이다.

“독일을 4개국이 분할점령한다, 전범들을 뉘른베르크의 국제재판에 회부한다, 해방되는 민족은 모든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 자유선거로 정부를 수립한다, UN을 창설한다”는 등의 합의가 있었다.

또한 폴란드 처리 문제를 놓고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하는 미·영과, 폴란드 공산당인 인민해방위원회를 지지하는 소련 사이의 심각한 갈등 끝에, 폴란드 신정부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수립하기로, 즉 좌우합작을 하기로 합의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는 결국 폴란드의 공산화로 귀결되었다.)

극동문제에 관해서는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3개월 내에 대일전에 참전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러일전쟁에서 잃은 소련 영토의 반환”을 약속했다.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바햐흐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얄타회담을 예의주시하면서 강대국 간의 음모와 거래로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해 줄 것이고 그래서 한반도에 소련군이 들어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이 독립한다고 해도 결국은 공산화될 것이 뻔했다. 이승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는 것이 급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임정을 승인만 해주면, 나중에 해방되었을 때 연합국 감시 하의 자유선거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과 함께, 임정 승인요청 서한을 루스벨트에게 보냈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승만은 1945년 봄 배포한 소책자 “한국 사정”에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소련이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한국과 같은 약소민족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다”라고 비판했다. T.루즈벨트가 1905년 태프트-가츠라 밀약으로 필리핀을 먹는 대신 조선을 일본에 넘긴 사례의 재판을 우려했던 이승만표 통찰력의 작동이었다. 이런 우려는 몇 달 후 있었던 UN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의 폭탄선언으로 나타난다.

1945년 4월, 연합국은 전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UN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UN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연합국들의 확실한 보장을 받으려고 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고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데 있어 소련의 대일전 참여와 협조가 절실한 입장이었다. 미군의 희생도 줄이고 전후 세계질서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미 국무부에는 좌빨들이 암약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기본방침은 좌우합작일 수 밖에 없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미국은 어리석게도 1948년까지도 이런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구라파와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반도에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려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 쯤 되어서야, 미국은 이승만의 좌우합작 거부노선에 동조했고,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에게는 좌우합작이란 곧 공산화였기에 이승만은 미국과 대립했다. 반면 김구의 임시정부는 이미 좌우합작을 하고 있었다. 미국 내 교포들도 좌우합작이 대세였다. 그들에게는 독립 이후의 나라가 어떻게 되든 당장 눈 앞의 독립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UN창립총회가 열릴 때 쯤,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미국교포들은 “이승만은 한국인의 대변자가 아니다”라고 음해하고 다녔다. 특히 조선민족혁명 노선을 따랐던 한길수는 미 국무부에 “이승만은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인물이며, 중경 임시정부는 몇 안 되는 늙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헐뜯었다.

일제패망이 다가오자 분열되었던 미국 내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는 했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동지회’를 포함한 9개의 한인단체들이 ‘재미 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승만은 연합위원회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 인사문제로 비롯된 갈등 끝에, ‘대한인동지회’가 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중경의 임시정부마저 이승만을 지지하자, 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기도 했다.

드디어 워싱턴에서는, 교포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별도의 조직을 가지고 따로 따로 미국정부를 상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는 중경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한족연합위원회’는 자기들 임의대로, 앞에 언급한 한길수는 ‘중한민중동맹단’의 외교대표와 ‘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의 외교대표로서 각각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 국무부에 있는 좌빨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분열과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이승만이나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는데 이용했다. 그래서 UN창립총회 전인 1945년 4월, 이승만은 UN총회 사무총장인 앨저 히스에게 한국 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유엔 창립 총회장에서 미국이 소련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다는 것과 그 이유를 눈치 챘다. 영국의 처칠이 미군과 영국군의 발칸반도 상륙을 끈질기게 주장했는데도, 루스벨트가 끝까지 거부한 사실에서도 이런 유추가 가능했다. 처칠은 발칸반도의 나찌 잔당을 몰아내고 아울러 발칸반도에 대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안한 것인데, 루스벨트가 거부했다는 것은 미국이 발칸반도를 소련에게 넘겨 줄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때 마침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이 미국에 나타났다. 그는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해, UN창립총회가 한창 진행 중인 5월 22일에 한인 지도자들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송자문의 의도에 불만을 가졌던 이승만은 항의 표시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단체들이 참석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송자문은 장개석의 좌우 국공합작을 추진하여 중국을 공산화시킨 X신이다.)

그 바람에 다시 한인단체가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표단, 김원용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단 등 3개로 분열되었다. 미국정부와의 관계에서 볼 때는 좌우합작을 거부하는 이승만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전술했듯이 이승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승만은 1945년 5월 14일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어느 소련인 망명객으로부터 들었다며, “유엔창립총회가 한국인 대표단의 참석을 거부한 이유는,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기기로 비밀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른바 얄타 밀약설 폭로였다. 유엔총회 회의장은 발칵 뒤집혔고 미 국무부는 즉각 부인했다.

이승만 발언의 파장은 영국에까지 미쳐, 하원에서 의원들로부터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 나왔고, 처칠은 “얄타에서 비밀협약은 없었지만,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것들은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바로 그 ‘대체적인 양해’ 속에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밀약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폭로가 전적으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나중에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저절로 확인되었다. 1945년 8월 12일부터 소련군이 한반도 북한지역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F.루즈벨트가 한반도를 전부 소련에 넘겨준다고 밀약했다는 폭로는 틀렸다. 결론적으로 반 쯤 맞은 폭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대일전에 소련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전세계적인 좌우합작 정책을 유지했는데, 중국에서 미국의 정책에 동조한 사람이 장개석의 처남이자 외교부장인 송자문이었다. 그는 소련 및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던 기회주의자로 모택동과의 좌우합작을 성사시켰는데, 결국 이게 중국 공산화의 원인이 되었다.

송자문은 한국이 독립될 경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특히 좌파 인물들이 집권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1942년에는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미끼로 김구에게 김규식, 김원봉 같은 좌파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 결과 임시정부가 ‘좌우합작’ 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크게 분개하여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송자문은 미국정부에게는 “중경 임시정부는 너무 분열이 심하고 허약해서 국제적 승인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1943년 여름, 이승만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보고서”를 F.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그 보고서를 마침 미국을 방문 중이던 송자문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송자문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이 너무 심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해서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막기도 했었다.

중국은 겉으로는 한국인들을 도우면서도 속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방해했던 것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국을 중국의 속방으로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제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는 말인데, 장개석 정부가 수 십년 동안이나 자기 영토 안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것 역시 당시의 동아시아판 국제질서였던 것이다.

요컨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이나 국제기구의 승인이 실패한 이유는, 첫째 대일전과 전후질서에서 소련의 협조를 얻기 위한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 둘째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셋째 미국무부나 중국 국민당 내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3중고 속에서 이승만은 해방 후 한반도의 미래까지 내다보며 외롭게 부딪혔다.

[사족 : 송자문의 누이가 유명한 송씨 3자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이다. 당시 중국에는 4개의 명문가문이 있었다.(송, 장, 공, 천씨로 기억한다.) 송자문은 당시 공상희와 더불어 중국, 아니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송애령은 공상희에게, 송경령은 손문에게, 송미령은 장개석에게 시집갔다. 각각 "돈과 조국과 권력과 결혼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손문에게 감동받은 송경령은 손문이 죽은 후, 모택동 밑에서 항일운동도 하고, 중국공산당 부주석을 2차례나 역임하여 명예 부주석으로 추대되었을 정도로 여성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반면 송미령은 “나에게서 동양적인 것은 오직 얼굴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구를 좋아했다. 그녀의 사치품을 운반하던 미 군용기의 병사들이 분노를 못 이겨 상자를 부숴버릴 정도로 사치를 즐겼다.

공상희와 송자문은 장개석 밑에서 서로 재무부장, 외교부장, 중앙은행 총재 등의 요직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국민당을 망친 장본인들이다. 나중에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당을 돕기 위해 우리가 보낸 돈은 모조리 바닥났다. 그 가운데 많은 돈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송자문과 공상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그 돈을 뉴욕의 부동산에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