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 미·소의 방해를 격파하고 대한민국을 만들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했을 때, 이승만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빨리 귀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앨저 히스같은 공산주의자들이 포진해 있는 미 국무부의 방해로 쉽지가 않았다. 고집불통의 반미인사로 낙인 찍힌데다가 반공·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귀국시키면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여권을 신청했지만, 한반도는 군사작전지역이라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여행허가증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행허가증을 신청하자 미 국방부는 맥아더 사령부에 전보로 요청했지만, 여권에 쓰인 “주미한국고등판무관”이란 직위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미 국무장관실이 국무부 여권과에 여권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승만은 여권을 반납하고 그 직위를 삭제한 새 여권을 받아야 했다.

그러자 국무부는 다시 이승만을 위한 수송편 제공은 맥아더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국방부에 가서 맥아더의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쳐달라고 했다. 그러자 국방부는 다시 국무부의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국무부 여권과에 특별허가를 신청했지만, 이번에는 여권과에서 더 이상 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분명한 귀국방해 공작이었다.

안타깝게 생각한 올리버 박사는 그에게 “미국정부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정부수립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할 것이므로 협조하라”고 설득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이승만의 정치외교고문이었다. 나중에 이승만 전기를 썼다. CIA의 스파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좌우합작은 공산화를 의미했기에 이승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조직이 없는 우파가 조직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으면 패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오와의 시골에서 닭을 키우며 살게 되더라라도 좌우합작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은 일제가 항복한지 40일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에야 하와이와 괌을 거쳐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것도 개인자격의 귀국이라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었고, 미군 군용기에서는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군복차림이었으며, 게다가 비밀리에 귀국해야만 했기에 김포 비행장에는 한 명의 환영객도 없이 몇 명의 미군들만 나왔다.

한편 11월 23일에는 중경 임시정부의 김구 일행도 귀국했다. 미군이 김구의 귀국을 추진한 것은 군정의 협력자로서 공산주의자들을 견제시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중국을 떠나기 전, 장개석은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면서 30만 달러의 전별금을 주고, 2대의 비행기로 상해까지 태워 주면서, 귀국 후 중국정부와의 신속한 연락을 위해 무전사 3명을 딸려 보냈다. 이런 환대의 배경에는 임정이 한국에서 집권하기를 바라는 중국정부의 속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여담이지만 이승만이 이렇게 귀국에 곤란을 겪은 것에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다. 일제시대에 해외에 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국적이나 미국국적을 가졌다. 김구나 안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미국국적을 갖지 않고 무국적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그 때문에 미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미 국무부에서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했고 그 때마다 미국국적 취득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미국은 존 하지 중장을 미 군정청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남한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는(미국은) 소련의 협조를 얻어 남북통일 정부를 세워주고 빨리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소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우파들과 똑같이 대우했고, 공산당 행사에 미 군정청 간부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 공산당 본부 지하실에서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낸 어마어마한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졌는데도 공산당 사무실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 미 군정청은 공정하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우익들을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1945년 귀국 후, 이승만은 이미 자신을 주석으로 앉혔던 “조선인민공화국”의 박헌영, 여운형 등 좌익들과 접촉했다. 좌익들이 협조의 조건으로 친일파 숙청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주석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므로 국가 건설과정에 함께 갈 수 없다,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독립운동 할 때부터 느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본능적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들어설 것이 확실해졌다. 아울러 신탁통치를 통해 한반도는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화될 것도 확실해졌다. 이승만은 이런 정세를 정확하게 예측했고 전력을 기울여 저항했다.

1946년 2월에 이미 미 국무부는 좌우합작 지원지침을 하지 중장에게 내렸다. 그것은,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틀 내에서 미·소의 합의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시키라, 그리고 그 대신 토지개혁 등 진보적인 강령을 추진할 중도파 지도자들을 찾아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소련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소련이 이미 1946년 2월,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위원회”를 만들고 3월에는 토지개혁까지 했던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정부가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 아닌가? 다시 말해 소련은 동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령지에서만이라도 확실하게 공산체제를 굳혀, 향후 남한까지 공산화할 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미군은 “미소공동위원회의의 틀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다”고 소련과의 협상에만 매달렸고 이승만과 김구가 협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청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전국을 돌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다. 소련군이 남한에 들어오면 동유럽처럼 공산화될 것이 확실하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련이 남한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과 유산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있었는데도 감히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지도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좌빨들이 잡고 있는 언론계와 지식인 사회로부터 분단 책동자로 공격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에서 화폐개혁으로 못쓰게 된 구화폐를 남한으로 가지고 들어와 자금도 풍부했기에, 신문사와 영화관을 사들여 대중선동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금기를 이승만이 과감하게 깨뜨렸는데 그것이 1946년 6월 3일의 ‘정읍 발언’이다.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선데다가 ‘미소공동위원회’도 더 이상 진전이 없으니, 남한 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소련군이 북한에서 이룩한 변혁적 조치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승만에게는 나라 없이 혼란 속에서 표류하기 보다는 우선 나라를 살려놓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정부가 미수립된 상태로 있다보면, 미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흥정에서 한국을 소련에게 넘겨 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과 같은 좌우합작의 강요가 될 위험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 경우에 남한에 찾아 올 것은 공산화 뿐이었다. 11월에 이승만은 북한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보도를 언급하면서 하루 바삐 정부를 세우고 국방군을 조직해야 남한의 공산화를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12월 12일, 미군정의 의회 역할을 하게 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문을 열면서 하지 중장이 과도입법의원에 좌파 인물을 많이 기용하자, 그렇지 않아도 사사건건 부딪히던 이승만은 하지를 더욱 비판했다. 하지는 이승만의 면전에서 “이승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고, 이승만은 “앞으로는 하지에 공개적으로 맞서겠다”고 응수했을 정도였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속한 정부수립을 위해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해 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도미한 적이 있었다. 이 때도 미 국무부의 반대로 맥아더의 군용비행기 이용이 거부당해 민간항공을 이용했다. 그런데도 미국정부 관계자들은 아무도 이승만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반공·반소주의가 미 국무부의 좌우합작노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언론기관을 통해 자신의 뜻을 홍보했다. “남한에 일단 과도정부를 세웠다가 때가 되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식 통일정부를 세우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미군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미 국무부 안에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있다”, “하지 중장이 좌익들에게 유리하게 행동하고 있다”, “소련군이 북한에서 50만 공산군을 양성하고 있는데도 미군은 남한에서 전혀 그러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고 있어, 남한은 북한에 의해 끌려다닐 위험에 놓였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이승만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쯤에 미국인들은 유럽, 발칸반도, 중동에서의 소련의 팽창야욕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승만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하지 중장도 1947년 2월 미국으로 갔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정부수립만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 방법이라는 기존의 정책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지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고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이승만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승만의 귀국 역시 출발 전날 군용기 탑승허가가 취소되는 등 미 국무부의 방해가 있었다. 할 수 없이 이승만은 하지 장군이 발행하는 한국 입국허가서도 얻지 못한 불안한 상태에서 민간항공을 이용하여 미국을 떠나야 했다. 동경에 도착한 이승만은 맥아더를 만나고 다시 장개석을 만나기 위해 상해를 거처 남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원래 김구 지지자였지만, 2차 국공합작이 끝나고 다시 모택동의 공산당과 내전을 하게 되면서 뒤늦게 공산주의의 전략을 깨달아,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대표인 유어만 공사를 통해 김구에게 이승만과 협력하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2일, 마침내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유화정책에서 강경정책, 포위정책으로 바뀌게 되는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를 경제적, 군사적으로 도우려는 의도에서 발표된 선언이었다. 선언이 발표된 다음 날, 감격한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그렇게도 완강하던 미국이 이승만의 주장과 통찰력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11월 14일, UN총회는 UN감시 하의 남북한총선거를 결의했다. 이승만의 예측대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공하지 못했고, 소련과 합의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국 좌우합작론자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사태는 이승만이 예견한 대로 진전되었고 그 때문에 국민들에게, 그 동안 미국 정부는 어리석었고 이승만은 선지자 같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은 생략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김구는 끝까지 좌우합작을 주장했고 국민들을 속였다는 사실이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투표(5·10선거)  전, 김일성이 꾸민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김구는, 김일성에게 아니 스탈린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

참가한 수 십개의 정당사회단체가 모두 김일성이 급조한 관변단체였고, 그나마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개회 3일 째에야 축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김구는 김일성이 마련한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기분이 상한 김규식은 불참했다).

김구는 김일성과 공동으로 “5·10선거를 인정할 수 없다,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해도 내전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면서, 미군철수를 주장한 성명서도 발표했다. 노동절인 5월 1일에는 중국 팔로군까지 참가한 군사퍼레이드를 참관하기도 했다.(그러고보니 오늘이 노동절이다.) 북한의 전쟁준비에 압도되었는지 김일성에게는 “통일되면 정치를 안할테니 과수원이나 하나 달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전술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대표 유어만 공사와 만나서는 “러시아는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그러면 단시간에 여기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김구는 북한의 막강한 군사력을 직접 목격했고, 김일성의 남침을 알았으며, 남한의 군사력은 협편 없고, 따라서 남한정부는 곧 소멸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국민들에게는 “북한은 남침하지 않는다. 김일성이 전기를 보내 줄 것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라며 거짓말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김구는 “공산주의 통일이라도 통일은 무조건 선(善)”이라고 믿었거나,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 국제질서와 공산주의에 무지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김구를 해방 전까지만 인정한다.

“여보게 백범. 김일성은 왜 만나러 가나? 갈 테면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담판해야지.”

이게 평양으로 떠나는 김구에게 했다는 이승만의 말이다.

이 문장은 국제질서에 대한 두 사람의 지식의 차이, 통찰력의 차이와 함께, 문제의 핵심에 직접 부딪히는 이승만의 기질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다. 꼭두각시 말고 조종자를 직접 만나라는 말이다. 국제질서의 핵심을 이해하고, 2명의 루즈벨트, 윌슨, 트루먼, 아이젠아워 등과 단도직입적으로 맞서면서 협상했던 이승만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김구가 정권을 잡았다면, 대한민국은 없었고, 한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어쩌면 한반도판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중·소의 주변에서 독립했던 나라 중에 공산화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그 공산화 지도를 제1편에서 제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