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편 - 평화선 선언과 독도 영유권 쟁취

6·25 전쟁으로 한국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 어부들은 한국의 해안과 독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샌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것이므로, 그나마 있던 맥아더 라인도 없어질 형편이었다. (일본 어부들은 맥아더 라인을 넘어 외해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선의 숫자나 성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게 우수한 일본 어부들의 침범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 한국의 수자원과 독도를 보호하기 위해 동해안에 평화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책(海柵, 해양경계선)의 상하에, 이미 알려져 있고 또는 장래에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보존 및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深度)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 해책에 대한 국가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

이 ‘평화선 선언’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기습이었다.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니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위기 상황이었다. 한일 간의 예비회담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을 때였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한일회담에서만큼은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고, 반면 한국은 일제 통치에 대한 보상심리와 경계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서로 간에 첨예하게 이해가 맞서고 있었던 셈이었다.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다.

일본정부의 공식 항의성명 뿐 아니라 일본 언론에서도 ‘공해자유를 완전 무시’, ‘한국, 어업교섭에 선수치다’, ‘오만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주권 선언은 영토침략’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 각지에서는 연일 평화선 선포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평화선 선포 후로는, 한일회담에 나온 일본대표들은 본건은 제쳐놓고 “한국측이 과연 한일회담을 계속하려는 성의가 있는지 묻고 싶다”는 등의 언사를 퍼부었다. 또 미국, 영국,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도 평화선 선포에 대해 비판적인 성명을 내면서 일본 편을 들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단호했다.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선박을 나포하고 체포한 어부들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1952년 2월에는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할 때는 한국 경찰이 일본 선장을 사살하기도 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했다.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기도 했다.

1955년 12월에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 경찰관 4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60년 1월에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하던 중 총격을 받고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도는 피로써 지켜졌고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승만의 이승만다운 결단 덕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