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한 날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는 워싱턴의 첫밤을 역 근처 펜실베이니아가에 있는 싸구려 호텔 마운트 버논에서 묵었다. 주머니에는 몇달러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WP 기자도 만나
"다음날 아침 1905년 1월1일에 나는 아이오와 서클에 있는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신태무씨가 공사대리로 있었는데 (중략) 홍철순과 김윤정은 서기관으로 있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
공사관 건물은 3층으로 큰 방이 9개나 있어 1층은 공관으로 쓰고, 2, 3층은 공관원들이 가족과 함께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묘한 것은 바로 옆에 일본공사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공사관 직원들 중 일부가 일본과 연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공사대리 신태무는 이승만의 협조 요청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의 대답은 "본국의 훈령이 없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김윤정은 비교적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태무가 엄비와 관계된 사실 등을 이승만에게 이야기해준 것도 김윤정이었다. 김윤정은 신태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김윤정은 이승만이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명을 받고 왔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자신이 공사가 되는데 도움을 준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월 초순 이승만은 아칸소주 출신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1887년 부터 2년 동안 주한미국공사로 일한 적이 있고 민영환 한규설과도 친분이 있는 친한파 인사였다. 이날 면담에서 이승만은 도미 때 트렁크에 숨겨온 민영환 한규설의 밀서를 딘스모어에게 전달했다. 딘스모어는 "존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을 주선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승만에게 협조를 약속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지를 방문, 기자를 만나 한국을 삼키려는 일본의 음모를 고발했다. 그러나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김윤정과 딘스모어의 협조약속을 받아낸 이승만은 밀사로서의 임무수행이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자신이 미국에 온 또 하나의 목적, 즉 유학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 도착과 함께 선교사 게일 박사의 소개장을 들고 장로교 계통의 캐비넌트 교회 루이스 T 햄린 목사를 찾아갔다. 햄린 목사는 서재필 박사가 미국서 재혼할 때 주례를 서기도 했던 친한파 인사였다. 게일은 햄린에게 이승만을 이렇게 소개했다.
"친애하는 햄린 박사님. (중략) 그는 모국에서 여러가지의 경험을 쌓았고 가지 각색의 물불의 시련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련을 통해서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입니다. (중략)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중략) 저는 그가 당신이 계시는 워싱턴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략) 그는 2, 3년동안 일을 하면서 공부하고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
햄린 목사는 처음 본 이승만을 유능한 현지 전도사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금전적 도움도 주고 여러가지 면에서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지 워싱턴대 총장이며 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을 맡고 있던 찰스 니드햄 박사에게 이승만을 소개했다. 이승만은 앨런 위버 학장과의 면담 결과 학문에 조예가 있다는 판정을 받아 장학생으로 2학년에 편입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2월에 시작되는 봄학기에 등록을 했다. 일단 숙식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 불과 몇 달러 밖에 없었던 이승만이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했을까. 초창기에 김윤정과 친했다는 기록을 보면 먼저 정착해있던 그로부터 얼마간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일요일마다 각 교회에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는 자서전의 구절로 보아 신앙간증과 한국사정 호소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강연을 해 얼마간의 용돈을 만들어 쓴 것 같다. 그리고 햄린 목사도 얼마 안되지만 조금씩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 물론 풍족했을 리가 없다.
이승만이 조지워싱턴 대학에 편입학했다는 사실은 돈 문제와 숙식 문제 등 미국에서의 안정적 생활은 물론 밀사임무 수행에 보다 열성을 다할 수 있게 보장해준 셈이었다.
이승만이 딘스모어 상원의원을 면담한지 약 한 달 만인 2월16일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헤이장관에게 면담시간을 잡도록 편지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일, "내일 아침 9시정각에 와서 나와 같이 국무성으로 동행합시다"는 소식이 왔다.
헤이장관 협조 다짐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20일 헤이 국무장관과 면담을 했다. 이승만이 다니던 캐비넌트 교회의 신자이기도 했던 헤이는 특히 한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개항 이후 한국에서 해를 입은 선교사가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우리 한국인들은 각하께서 중국을 위해 힘쓰신 것처럼 한국을 위해서도 힘써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부탁했다. 헤이는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이승만은 뛸 듯이 기뻤다. 한미상호조약의 의무이행 촉구야말로 도미 목적의 최우선 과제였다. 미국무장관이 이 문제에 대해 긍정적 협조를 다짐했으니 그로서는 대성공이라 여길만 했던 것이다.
그는 즉각 면담결과를 국내의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통보했다. 당시 한국의 외교는 사실상 일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딘스모어의 도움을 빌어 미국 외교루트를 이용했다. 덧붙여 김윤정의 승진 부탁도 함께 보냈다.
꼭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윤정은 6월23일 3등서기관으로 승진, 신태무의 후임 대리공사를 맡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과의 사이는 원만했다.
한편 하와이에서는 한인들이 모여 5월3일 에와 친목회라는 단체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7월 중순 교민대회를 열고 윤병구 목사를 대표로 뽑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독립을 청원키로 했다. (이승만 계열의 기록이나 전기들 에서는 윤병구와 이승만 두 사람을 대표로 뽑았다고 돼있으나 이승만이 당시에는 하와이와 깊은 연고를 갖고있지 않았고 나이가 30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뒤늦게 합류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
이날 교민대회의 목적 중에는 청원대표 선출 이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하와이를 들른 윌리엄 태프트 국방장관의 환영이었다. 여기서 태프트는 한인들의 요청을 받고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러나 태프트의 방일 목적은 "일본은 필리핀을 침범하지 않고 미국은 한국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으러 가는 것이다.
한국문제를 흥정하러 가면서도 한국인 대표에게 소개장을 써준 태프트, 무슨 목적으로 일본에 가는지도 모르고 독립에 도움이 될까해서 환영대회를 열어준 한인동포들, 그런 소개장을 들고 대통령에게 청원하러 간 윤병구와 이승만 .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모르던 두 사람은 워싱턴에서 만나 필라델피아의 서재필박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청원서 문안을 마지막으로 손질했다. 내용은 역시 한미상호조약의 규정준수를 청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8월 초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던 뉴욕주 오이스터 베이로 가서 옥타곤 호텔에 투숙했다. 그들은 대통령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눈길을 끌어 8월4일자 뉴욕 트리뷴지에는 두 사람의 회견기사가 게재됐다. 그들은 다짜고짜 대통령 비서관들을 만나 태프트의 소개장과 청원서 사본을 들이밀고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김윤정 막판 발뺌
즉답이 없자 실망한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그날 저녁 "내일 오전 9시까지 오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5일 별장으로 가 응접실로 안내됐다. 간을 졸이며 앉아있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들어왔다. 당황한 그들은 인사나 자신들의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청원서만 불쑥 내밀었다.
루스벨트는 청원서를 받아들며 말했다.
"나를 찾아주니 기쁘오. 나도 당신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소.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 채널을 통하기 전에는 처리하기가 어렵소. 당신네 공사를 시켜 국무부에 제출하시오. "
루스벨트는 간단히 말하고 바로 나가버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곰곰이 따져보았다면 외교적 수사를 동원한 거절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다정한 말은 외교경험이 없는 두 사람을 아주 기쁘게 했다. 이제 공사의 협조만 얻으면 다 될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곧바로 뉴욕으로 나와 워싱턴행 기차를 탔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공사관으로 갔다. 이승만으로서는 그동안 친분을 쌓아두고 그의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고 스스로 믿고있는 김윤정을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윤정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도 과거 신태무와 마찬가지로 "정부 훈령이 없는 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김윤정의 태도는 단호했다. 결국 공사관을 통한 밀서 전달은 실패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후 각종 증언이나 기록등을 통해 "김윤정은 자신의 공사직 유지를 위해 일본에 협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때 협조를 해주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라고 수차례 아쉬움을 표했다.
이와 관련해서 김윤정의 손자 김대희씨(56.서울시 서초구 반포동)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조부께서는 분명 미국무부에 전달했으나 직원들이 12시에 오라며 사실상 접수를 거절해 그렇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누차 말씀해주셨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생애와 관련해 밀사임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를 떠나 젊은 청년으로 국가적 대사를 끝까지 수행했다는 것이다. 김윤정이 협조했다고 하더라도 국권상실을 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