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가 감방문을 열었을 때 잠시동안 그는 흔들흔들 선 채로 벽과 천장 그리고 마룻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지가지의 비참한 나날과 굴욕을 받았던 장소라고는 하나 많은 추억과 감회가 가득 차 갑자기 그 곳을 뒤로 하고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1904년 8월9일 석방명령을 받은 직후의 상황을 이원순의 전기 "인간 이승만"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또 이 책에는 "그의 눈에는 감옥 뒤뜰에서 사형당한 동지들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의 귀에는 또 다시 그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특히 그는 위대한 애국자 장호익을 회상했다. 장씨는 감옥의 뒤뜰에서 목을 베일 때 제3도가 그의 목을 베어 떨어뜨릴 때까지 만세 를 외쳤던 것이다"라는 다소 감상적인 구절도 나온다.
1904년 석방
이승만에게 석방을 통고한 사람은 그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풀었던 간수장(혹은 감옥서장) 김영선이었다. 두 사람은 "부끄러움도 없이 얼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가 다시 햇빛을 본 1904년 8월의 정국은 투옥됐던 1899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조선조정은 러시아로 기울었다. 이는 곧 조선에서 일본입김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옥중에 있던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세계열강들이 공동출병해 반란을 진압했는데 이때 만주에 군사를 파견했던 러시아가 영구점령을 위해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이는 일본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대립하고 있던 영국 또한 이를 위협으로 여기고 일본과 영국은 1902년 1월 동맹을 체결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일본은 영국, 미국과 함께 러시아 군대가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러시아는 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심지어 러시아 군대는 1903년7월 압록강을 넘어 용암포에까지 들어왔다.
이처럼 이승만이 옥중에서 학교와 도서관 운영을 하는 한편 영어 공부에 한창일 무렵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날로 악화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과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점차 노골화되고 전운까지 감돌자 조정에서도 1904년 1월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이 1904년 2월10일 려순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면서 결국 전쟁이 터졌다.
이승만은 감옥에 있을 때 만 해도 일본에 대한 인식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의 옥중기 독립정신 29장 일본이 흥왕한 사적을 보면 당시 그의 일본관은 비교적 객관적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의 할복자살 습속을 언급하며 "그 독한 성품은 족히 칭찬할 바가 아니나 남에게 부단히 지기 싫어하는 기운은 가히 본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또 1853년 개항 이후 40년 동안 급격한 근대화를 추진해 온 일본에 대해 "전국에 하나도 변치 않는 것이 없어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일본은 다만 그 나라 이름 두 글자 외에 변치 않는 것이 없다 하나니 이렇듯 속히 변혁함은 세계 사기에 드문 일이라, 나라에 신민된 자들로 하여금 족히 부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리로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그는 일본 자체를 좋게 생각했다기보다 개화에 성공한 일본을 부러워했다. 이런 인식은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기 전 개화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일본관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노리는 여러 열강 중 하나였던 데다가 개화파의 대부분은 일본을 개화의 모델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승만의 반일을 생래적인 것으로 보아 감정적 반일로 보아온 것이 기존의 견해였지만, 사실은 1904년 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그의 시각이 바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 재임중에 정말 일본과 국교 재개를 할 의사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국교재개를 시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일태도를 보이던 중에 4.19로 하야함으로써 유야무야된 것인지를 가리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원순씨의 전기에는 "이승만씨는 거리에서 또는 정부 건물 등에서 마치 개미처럼 바쁘게 쏘다니는 거만한 일본 관리나 군인들을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구절이 있다. 그만큼 조선땅에서 일본의 득세가 폭넓게 확산돼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승만이 감옥에 가기 전 독립의 기운이 높았던 때와는 모든 것이 딴 판이었다.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열성이었던 옛동지들은 그동안 변절했거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망연자실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씨의 전기를 보자.
"노도와 같이 퍼져가던 우리나라 국민운동이 그 형적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을 출옥 후 비로소 안 이승만씨는 크게 실망하였다. "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연승을 거듭하자 국내 일부세력은 동양의 소국가가 서양의 강국과 맞서 이기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탄했다. 서둘러 일본 측과 선을 대려는 움직임도 잇따랐다. 황현의 매천야록의 제4권 광무 8년 갑진(1904년) 편을 보면, 민모라는 고위관리가 자신의 부인을 일본공사 임권조에게 보내 통정을 하게 하자 그 부인은 종종 밤을 지내고 오므로 서울사람들은 가요를 지어 '숲속에서 자고 돌아오지 않네'라고 비꼬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의 일본에 대한 일부 세력의 비굴했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개화세력의 일부도 한말 왕조의 부패와 무능을 인정하고 일본의 요구와 주장에 굴복하는 분위기였다.
일, 협동회 탄압
그러나 이승만은 달랐다. 일본은 한국을 삼킬 의도가 분명히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일본관은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어갔다.
당시 서울에는 사회운동단체로 반일성향의 보안회와 친일성향의 일진회가 있었다. 보안회는 이승만이 출옥하기 직전인 1904년 7월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모인 단체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감옥 동료인 이상재, 이준을 비롯해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이동휘, 안창호 등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승만과 모두 가까운 인물들이지만 이승만이 보안회의 설립에 깊이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보안회의 후신인 협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보안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8월27일 자신들이 주도한 집회가 해산당하자 9월11일 보안회를 협동회로 개편했다. 보안회 때는 배후에 있던 이상설(회장), 이준(부회장) 등이 전면에 나섰고 이승만은 편집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출옥 후 첫 사회활동인 협동회 활동도 일본의 탄압으로 한 달 남짓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는 협동회 활동을 하는 한편 YMCA에도 관여했던 것같다.
다른 전기나 자료들에는 없지만 서정주씨의 전기 "우남 이승만전"에 나오는 "그는 출옥하자 마자 바로 별 휴양할 겨를도 없이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에 나가 그 총무의 일을 맡아보는 한편 앞으로 걸어나갈 진로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구절로 보아 선교사 친구들의 도움으로 YMCA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집필할 만큼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던 그에게 종교단체에서 일하는 것이 흡족했을리가 없다.
그리고 정진석교수(외국어대 언론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승만은 출옥한 직후 제국신문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출옥한지 2개월만인 1904년 10월10일 주한 일본군 헌병사령부는 제국신문에 대해 무기정간 명령을 내렸다. 정간 사유는 10월7일자 논설이 일본의 군사상 및 치안상 방해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강제정간인 이 사건과 관련해 정교수는 "당시의 인적 구성이나 글의 내용을 볼 때 문제의 논설을 쓴 것은 이승만으로 여겨진다"고 밝혔다.
협동회 활동의 좌절, 제국신문의 강제정간 등 일본의 탄압은 그의 모든 활동을 차단했다. YMCA 총무로 만족하고 지내기에는 당시의 시국이 애국청년 이승만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로서는 탈출구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치 않으나 이승만은 민영환, 한규설 등 개혁파 중신들과 접촉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의논하며 나라의 장래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이원순씨의 전기를 보자.
유학생 여권 받아
"이승만씨는 조정 안에서 가장 유력한 개혁주의자인 민영환, 한규설씨와 이야기를 해보고 비로소 그들도 사태진전에 관해 자기와 같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일시에 속국화되는 움직임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과 이승만씨는 1882년의 (한미) 우호조약에 의거하여 미국대통령에게 탄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데 완전 합의를 보았다. "
한-미우호조약 중에 분명히 약속돼 있는 상호방위 조문의 발동을 탄원하자는 것이었다. 개혁파의 주요지도자들은 그 적격 인물로 이승만을 꼽고 그를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유학생 자격의 여권을 발급받아 고종황제가 워싱턴 공사관에 보내는 메시지를 트렁크 속 이중바닥에 감추어 11월4일 도미길에 오른다. 동행자는 유학생 이중혁으로, 이중혁은 감옥에서 이승만에게 호의를 베푼 부간수장 이중진의 친동생이며 이중진은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눈물로 송별하는 아버지와 아들 태산을 뒤로 하고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제물포항에 도착해 다음날 오후 3시에 출발하는 미국상선 오하이오호에 올랐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 만 29세였다.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