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비호 비판
이승만에게 가해지는 가장 가혹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친일파의 비호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이승만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나아가 특위를 사실상 해체 시켰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점은 사실 관련 면에서는 상당 부분 타당한 비판이다. 그러나 평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승만이 당시 밝혔던 대로 국가운영의 인재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민족정기의 회복이라는 명분론의 양축에서 어떻게 평가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측면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까지는 당시 이승만이 취했던 태도에 대해 진정한 토론 보다는 정파적 입장에 따라 구국의 용단이었다는 견해와 반민족적 행위였다는 견해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양상이다.
1948년 8월5일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의 구성안을 긴급 동의로 제안했다. 초대 내각의 구성원을 발표한 이틀 후의 일이다. 이미 해방 직후 부터 친일행위자들의 처벌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이 폭넓게 형성돼 있었을 뿐아니라 제헌헌법에도 101조에 1945년 8월15일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었기 때문에 친일행위자 처벌문제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연한 과제였다.
김웅진의 제안에 대해 겨우 안정돼 가는 사회를 다시 혼란에 빠트린다, 경제복구에 필요한 법령 제정이 시급하다는 등의 일부 반론이 있긴 했지만 친일파 처벌문제는 해방 후 3년간 미군정의 지배로 인해 유보돼 온데다가 일반 국민들의 친일파 처벌 요구가 거셌기 때문에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국회는 열띤 토론 끝에 김웅진의 제안을 재적 1백55, 찬성 1백5, 반대 16의 압도적 다수로 가결시켰다.
이렇게 해서 반민족행위처벌법 입법에 들어가 9월7일 제59차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쳐져 재적 1백41, 찬성1백3, 반대 6으로 통과돼 8일 정부에 넘겨졌고 9월 22일 이승만에 의해 법률 제3호로 공포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목은 반민법 제정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이다.
반민법 심의가 진행 중이던 9월3일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친일파 처리 문제에 신중한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어 이승만은 반민법의 처리문제를 국무회의에서 논의토록 했다. 안호상씨는 당시 분위기와 관련해 "이대통령도 처벌해야 할 친일파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일제 말기 우리 국민들은 자의였건 강요에 의해서였건 친일행위에 안걸리고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사업을 포함해 무엇인가 일을 하려면 총독 정책과 얼마간의 타협은 안할 수 없었다. 이 박사도 그랬지만 나도 인재등용이란 면에서 그나마도 부족한 지식인 실업인 등의 친일을 문제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의견은 다른 국무위원들의 경우에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국무회의는 결국 만장일치로 국회의 반민법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반민법 거부는 이뤄지지 않고 9월22일 공포됨으로써 법률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어 국회에서 10명의 위원선임을 마친 특별조사위원회는 10월23일 제1차 위원회를 열고 위원장에 김상덕, 부위원장에 김상돈을 각각 선출했다. 그리고 10명 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본 국회는 1949년초 특별재판관 15인과 특별검찰관 9인 및 중앙사무국의 조사관과 서기관을 선임했다. 이어 반민특위가 반민법 해당자들에 대한 검거활동에 들어가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처벌대상 축소 당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하였다면 이완용, 송병준 등 반역 원괴를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돈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지금까지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지금 국회에서 이를 해결하기로 진행중이니 그 제정된 조리와 선임된 법관으로 이 중대한 문제가 영구히 그릇됨이 없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한가지 중대히 생각할 것은 우리가 건국 초창에 앉아서 앞으로 세울 사업에 더욱 노력하여야 할 것이요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해되는 것보다 과거의 결절을 청쇄함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쇄신하고 국가의 기강을 밝히기에 표준을 두어야 할 것이니 입법부에서는 사법부에서 왕사에 대한 범죄자의 수량을 극히 감축하기에 힘쓸 것이오 또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에는 관대한 편이 가혹한 형벌보다 동족을 애호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이 담화가 발표되자 반민특위 김상돈 부위원장은 즉각 "누구든 막론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처사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며 또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보듯 반민특위의 구성과 활동의 배경에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대립이라는 권력투쟁이 놓여 있었다. 이는 1월25일 반민특위가 일제 때부터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전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전격 체포하면서 표면화됐다.
노덕술의 체포는 반민특위의 활동목표가 행정부 내 경찰조직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덕술이 검거되자 이승만은 그 이튿날 위원장 김상덕 등 6명의 특위위원을 불러 노덕술의 석방을 종용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법무부 검찰과장이었던 선우종원은 "초기 경찰 수뇌부인 김태선, 최능진 등은 미국에서 들어온 뒤 우리 경찰 내부 실정을 잘 몰라 친일 경찰 손에 놀아났던 것같다. 노덕술의 경우도 사건의 조작만을 일삼는 등 백해무익했으나 일제시대 경찰출신이 단합하여 한명이라도 처벌을 받게 되면 그들 모두가 와해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똘똘 뭉쳐 있었다. 대통령 역시 국내사정에 어두워 노 등이 공산당을 잡는 기술자이며 그들을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의 짓이라고 하자 노의 검거를 제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이승만은 2월2일 반민특위 활동은 3권분립에 위배된다. 좌익 분란분자들이 살인방화 등 지하공작을 하고 있어 경험있는 경관의 기술이 필요한데 마구 잡아들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해 국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어 이승만과 국회의 성명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부 친일파에 대한 검거활동이 이뤄졌고 5월의 국회푸락치사건, 6월6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6월26일 백범 김구 암살사건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반민특위 활동은 위축되고 결국 8월31일 활동을 중단하고 만다. 당초 반민법의 공소시효는 1950년 6월20일까지였지만 49년 7월6일 특위 검찰관 곽상훈의 개정안이 제출돼 통과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치 강제성에 의한 해산이라는 의미에서 해체라는 것은 최소한 형식적으로 볼 때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 활동의 민족사적 중요성이나 당시 여론을 감안할 때 이승만이 보여준 행태는 석연치 못한 점들이 많으며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점에서도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될는지 모른다.
전체 상황 고려해야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사실은 국가 건설 초기의 건국 지도자로서, 그리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이승만의 선택이 권력유지 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반민특위가 발의된 1948년 8월부터 49년 초까지의 정국 상황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국내의 반민특위 연구는 지나치게 반민특위 만을 떼내어 고찰함으로써 당시의 전체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그것을 보는 것을 방해한 측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4월부터 제주도에서는 총선거 반대를 명분으로 내건 남로당이 주도한 봉기가 발생해 치안부재 상태에 빠져 10월8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그런 가운데 북한에는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고, 9월15일 부터는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상황 또한 계속 악화됐다. 10월19일에는 여순 반란사건이 발생해 25일 여수 순천지구에 계엄이 선포됐다. 이것만으로도 당시의 정국은 정상적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라는 건국노선에 이어 다시 한번 명분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이 지향한 반공 자유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골격은 다소 튼튼해졌지만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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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편. 농지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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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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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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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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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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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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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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