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캐릭터 작용



이승만이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선 이래 그에게는 성격차, 노선차, 배경차 등으로 인해 다양한 라이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그를 따르다가 갈라선 인물도 있고 처음부터 대립했던 인물도 있다. 이승만처럼 오랫동안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을 한 경우 어쩌면 정적들이 많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명 거기에는 모든 일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서 생각하는 이승만 개인의 강한 캐릭터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승만이 1912년 본격적으로 미국생활을 시작해 1945년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30여년간 그와 대립했던 인물은 줄잡아 10여명에 이른다. 이 중 단순한 개인감정 차원을 넘어 일정한 정치적 견해나 노선차이를 드러낸 인물만 손꼽아도 박용만,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규식, 한길수, 김원용, 김용중 등이 있다.


이들과의 갈등 내용이나 그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승만의 강한 개성과 함께 그가 지향한 노선, 즉 외교노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박용만은 원래 이승만을 따르던 인물이었다. 1881년 생으로 이승만과는 옥중동지이며 이승만을 중국의 강유위에 비유하고 자신을 양계초에 비유하며 "나의 일생을 이승만씨 하는 일에 제공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힐 만큼 원래는 절친했던 사이였다.


박용만은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라스카 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이스팅스 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방향을 무장투쟁론으로 잡은 그는 1928년 암살되는 그 날까지 일관되게 무장투쟁노선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박용만의 무장투쟁노선이 전혀 접점을 찾지 못하고 대립으로 일관한 점에 있다. 물론 처음에는 노선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는 여전히 밀접했다.


1913년 이승만이 하와이로 간 것도 박용만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1914년 이승만의 학교건립계획과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 병영설립계획이 충돌했을 때 일차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결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들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은 몇년 후의 일이다. 1918년 1월 재정문제를 둘러싼 송사는 두 사람을 영영 갈라 놓고 말았다.


이때 이승만이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가 자신의 세력을 공격한 박용만 세력을 비난하며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군단이 일본 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에 박용만은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라고 맞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박용만의 악감정은 극에 달했으며, 상해임정에 외무총장으로 임명되고서도 이승만 밑에는 못있겠다 며 취임을 거부하고 줄곧 반이승만운동을 전개하며 신채호와 손잡고 무장투쟁을 도모했으나, 조선총독의 초대에 응한 것이 빌미가 돼 1928년 10월16일 의열단원 이해명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안창호 은근히 저항



안창호와는 격렬한 대립을 하지 않았지만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국민회를 장악한 뒤부터 갈등이 심화됐다. 사실 국민회는 안창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이 미본토에서도 학식과 명망을 기반으로 안창호를 누르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안창호도 은근한 저항으로 일관했다.


1915년 9월에는 안창호의 추종자인 오진국이란 청년이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던 박용만을 찾아가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가벼운 상처를 입히는데 그쳤다. 다시 그는 이승만을 암살할 목적으로 하와이로 가던 도중 선상에서 투신 자살했다. 당시 재미 한인 세 지도자들 간의 반목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8년 10월 흥사단 내부모임에서 안창호가 행한 연설을 보면 이승만에 대한 안창호의 내심을 알 수 있다. 박용만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해 비판을 가한 뒤 안창호는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승인을 요구하여 교섭한다, 장서한다 함은 어리석은 희망이라, 자기의 일은 자기가 스스로 아니하고 가만히 앉았다가 말 몇마디나 글 몇줄로써 독립을 찾겠다는 것이 어느 이치에 허락하리오"라고 이승만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할 때, 이승만이 상해 임정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안창호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북 인맥 중심의 서북파에 속했던 안창호는 이승만의 임시정부에 반대해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를 여는데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승만이 1920년 12월말 상해 임정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상해에 가서 만나게 되는 이동휘 국무총리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악연이다. 


1872년생으로 이승만보다는 세살 위인 이동휘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5년 노령으로 망명한 뒤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등 사회주의에 경도된 인물이었다. 애당초 미국식 정규교육을 받은 이승만과는 대립이 예상됐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은 1921년 1월5일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부터 폭발됐다.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 문제를 거론하며 그 과정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이동휘는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인 자신에게 행정 결제권을 위임하라고 촉구했다. 물론 둘 다 이승만의 거부로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 또 이동휘는 국무총리 제도를 없애고 국무위원 제도를 채택해 국무위원의 다수결로 행정을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사회주의적 의사결정 제도를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것이 상해정부가 그 법통을 이어받은 한성정부의 제도와 어긋난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이동휘는 자신의 주장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1월24일 전격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승만은 2월4일 이동휘를 면직시켜버렸다.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은 차후 이승만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이승만과 김규식의 관계는 한때 협조관계에서 대립관계로 돌아선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풍부한 학식과 외교노선 주창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고 오히려 개인의 성격차에서 대립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승만보다 6년 늦은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김규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프린스턴 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교육자로 활동하다가 1918년 모스크바 약소민족대회, 1919년 파리 강화회의등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면서 본격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일시적으로 이승만이 주도하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상해임시정부 학무총감으로 재직시 이승만의 독선적 행태에 반감을 갖고 그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이승만과는 화해하지 못했으며 해방이 된 후에는 하지중장이 구상한 좌우합작노선에 따라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했으나 실패했으며 6 25때 납북당했다.


노선면에서 이승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김규식의 경우, 여러모로 정치가이기 보다는 학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철저한 현실주의 정치가인 이승만하고는 여러가지로 화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와 이승만의 갈등은 크게 보면 무장투쟁노선과 외교노선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 볼 경우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지낸 전통사회의 엘리트인 신채호와 과거에 떨어지고 신문명을 받아들여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새시대 엘리트 이승만과의 대립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결국 명분론과 현실론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한길수 베일 속 인물



194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한 한길수란 인물은 여러가지로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당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장석윤옹(91)은 "그 사람은 하와이 구세군에서 활동했던 인물인데 갑자기 워싱턴에 나타나 자신이 한-중 민중동맹을 대표한다며 한국인 청년들을 선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연설 솜씨가 좋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몰라도 미국 상원의원들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한동안 많은 재미한인들이 그에게 휩쓸리기도 했어요"라고 밝혔다. 그러나 여러가지 면에서 이승만의 정적이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인물은 못된다. 그것은 그 이후 그의 행적 자체가 불투명한데서도 간접 확인된다.


그밖에도 40년대 초에 국민회 계열의 김원용이나 김용중 같은 이들이 이승만에게 대항하며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했다. 특히 김원용은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인물로, 지금도 미국활동 당시의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성서처럼 인용되는 재미한인 50년사를 쓴 장본인이다.


이처럼 많은 라이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의 독선적 성격이라는 측면을 읽어낼 수도 있고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라는 측면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