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05년 2월 조지워싱턴대 윌버 학장과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비록 미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학문에 대한 나름의 깊이가 있다고 인정돼 2학년2학기로 편입됨과 동시에 특별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러나 그해 8월까지 첫학기는 밀사 임무를 수행하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가 밀사 임무의 좌절 이후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 솔직하게 적혀 있다. 공사관의 비협조로 밀사 수행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는 상당히 격한 어조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절망감을 표현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윤리상태가 얼마나 땅에 떨어진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김윤정(당시의 주미 공사)은 한국사람 중의 좋은 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한국사람이 저렇게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자기 친구들을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처럼 짐승같은 저열한 상태에 빠져있는 한 한국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한국사람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한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이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그는 첫 저서 독립정신에서도 애국심이 없는 일부 한국인들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서구적 기준으로 무조건 한국을 나쁘게만 보려한 사대주의적 근성이라는 비판이 제기될는지 모른다. 이승만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 중에는 이런 유형의 것들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화라는 척도에서 볼 때 이승만의 한국사회 비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그는 개화파 중에서 친일파로 전락한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한국인, 한국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와 부정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개선을 위한 비판이었을 뿐이다.
"그때 부터 나는 공부에 전념하였다. 오로지 남은 하나의 희망은 한국사람을 갱생시키는 것이고 그 길은 기독교교육이라고 나는 믿었다. 나의 인생 목적은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써먹으려고 서양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교육을 통해서 서양책들을 한국말로 번역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기독교 교육 전념"
번역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데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번역의 문제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역할을 번역에서 찾았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이해를 위한 올바른 접근법을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승만은 실제 옥중에 있을 때 중국인 채이경(채이경)이 쓴 중동전기본말 을 번역했고 (이 번역본은 1917년 자신이 주관한 미하와이 태평양 잡지사에서 청일전기 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영어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공부는 3학년이 된 9월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그가 배운 과목은 논리학, 영어, 미국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사회학, 서양사, 고대어학 등이었다. 서양학문의 기초과목들인 셈이다.
그러나 서양학문에 대한 소양이 배재학당 시절 배운 초보적인 영어와 산술이 전부였던 그로서는 어느 하나 제대로 따라가기 쉬웠던 과목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생계문제에 대한 불안과 굶주림으로 인한 쇠약한 몸은 그로 하여금 공부에만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학시절 그의 성적을 보면 서양사만 A 학점을 받았을 뿐이고 대부분은 B나 C 학점이었다. 특히 동양학생에게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어와 수학은 D 학점을 받았다. 그러나 유학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감안을 해주지 않던 당시 미국대학들의 풍토를 감안한다면 사실 30세가 넘은 만학도 이승만으로서는 졸업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강연은 계속 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메모를 보면 이런 강연들을 통해 번 돈이 2달러, 3달러, 많게는 30달러였다고 돼있다. 그러면 이승만은 이역만리에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강연했길래 지속적으로 강연을 할 수 있었을까.
청년시절부터 이승만을 따랐던 원로 경제인 이원순의 전기는 이에 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연설은 주로 YMCA 주최로 열렸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동부 도시에 있는 수많은 단체들로 부터 초대를 받게 되었다. 어떤 때는 70장에서 1백장에 달하는 사진을 환등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제는 언제나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 사업과 한국인의 점진적 향상에 관한 것이었다. "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미지의 나라 한국의 풍속과 기독교 전파에 관한 이야기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1907년 6월13일자 워싱턴포스트 지방판 기사는 당시 이승만이 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얼마나 인기를 모았던가를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자료다.
수백명 폭소-박수
이승만씨는 한국의 양반 부인은 외출을 하지않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줄 수 없다고 말해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냈으며 그 대신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중류층 부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강연회에는 수백명이 참석했으며 이 젊은 한국청년은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가 대학시절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면 과연 미국에 온지 3년도 안돼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폭소를 자아내고 박수를 받는 강연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승만은 생활이 빈궁한 가운데도 창백한 학생이 되기 보다는 미국학생 못지 않은 열성적인 대학생활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도 멋을 부릴 줄 알았다. 다시 말하자면 로맨스도 있었다. 그는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정구를 즐기고 워싱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경쾌히 달리기도 했다. 모자를 써도 비뚜로 쓰고 다녔다. "
캠퍼스의 자유를 나름대로 만끽하며 미국사회의 자유를 호흡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인을 상대로 탁월한 연설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타고난 연설능력도 크게 도움이 됐다. 이미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독립협회 회원시절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명연사로 이름을 날린 바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승만의 연설은 떨림이 강한 노정객의 담담한 목소리 정도이다.
그러나 청년시절 이승만의 연설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생활 시절 그의 연설에 관해서는 몇가지 증언이 전한다. 이승만의 친구이며 고문이었던 올리버 박사는 "그의 목소리는 보통 이상으로 울리고 달콤하며 음정의 폭과 변화가 풍부하다. 그의 얼굴과 몸동작은 동양인 답지 않게 표현력이 강했다. 연사로서 그는 생동하는 표현 기술보다는 박력있는 정열이 특징적이다"고 평한 바 있다. 기교보다는 내용과 열정이 강했다는 말인데 이는 이승만의 한시에 대한 평가와도 일치한다. 이승만은 대학에 다닐 때 두 가지 슬픔을 겪는다. 하나는 그를 지원하고 밀사 임무까지 맡겼던 민영환이 1905년 11월 한일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해 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국내에 믿을 만한 끈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감옥에서도 데리고 잤던 외아들 태산(일명 봉수)의 죽음이다.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때 태산은 1905년 6월경 박용만과 함께 미국으로 온 것같다.
"나의 아들이 왔다. 박용만씨가 그를 한국으로부터 데려왔는데 나는 필라델피아의 어떤 가정에 그를 맡겨야 했다. 거기서 그는 죽고 말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여기서 어떤 가정이란 이승만이 대학에 다니면서 방학 때면 가서 쉬곤 하던 보이드 부인의 집이다. 보이드 부인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지극한 관심을 보였던 선교사 조지 H 존스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가 친하게 된 사람이었다.
이승만이 처음에 아들을 데려올 생각을 했던 것은 1905년 6월 까지만 해도 김윤정과 사이가 좋았고 또 김윤정의 가족들이 미국에 와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산은 그래서 처음에는 김윤정의 집에 있었다. 이때 태산의 나이는 8살 안팎이었던 것 같다.
미국인에 아들 맡겨
그러나 이승만과 김윤정이 갈등을 빚자 곧바로 워싱턴의 한 부잣집으로 태산을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자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의 보이드 부인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1906년 2월24일 밤11시 반 그는 보이드부인으로 부터 태산이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바로 역으로 갔으나 열차는 이미 없었고 다급해진 이승만은 전보로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경과를 지켜보자는 답신이 왔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던 그에게 25일 오후2시 다시 보이드부인으로 부터 태산이가 위독하니 내일 3시20분 까지 오라 는 전보가 왔다. 그는 그날 밤 9시30분 열차로 떠나 26일 새벽2시30분경 보이드 부인 집에 도착했다. 보이드부인은 이승만에게 "디프테리아로 사흘 동안 누워있다가 시립병원 격리병실에 입원시켰다"고 말했다. 날이 밝자마자 이승만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태산은 이미 하루 전에 죽어 화장까지 끝난 상태였다.
6대독자였던 그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그의 비망록 1906년 2월25-26일자에는 별다른 언급없이 그냥 이렇게 적혀 있다. "
2월25일 오후 7시 태산이가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었다. "
"2월26일 노드필드 화장터에서 태산이의 장례를 치렀다. "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