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끝내고 귀국을 망설이고 있을 무렵 그에게 아주 솔깃한 제의가 들어왔다. 서울 YMCA에서 일하고 있는 공업부 간사 GG그랙이 그를 찾아와 서울YMCA 학생부 간사로 초빙하겠다는 국제 YMCA 책임자 존 R 모트씨의 초청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그는 귀국 결심과 함께 모트씨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 여기서 이승만이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는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사실 아무리 나라가 망했다고는 하지만 프린스턴대 박사를 받고서 대학 교수가 아니라 사회단체의 중간간부를 맡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격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동안 자신이 미국에서 벌인 반일활동으로 인해 귀국할 경우 신상에 좋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가 국제 YMCA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물론 대학시절부터 그가 기독교 교육에 종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0년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 이유는 신분보장을 받으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YMCA에서 일하는 것이 식민지 한국에서의 신분보장에는 유리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YMCA 측에 양해를 구해 귀국 루트를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으로 결정했다. 이번에 귀국하면 다시 세계여행을 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국제정치의 본 무대인 유럽국가들을 돌아보고 귀국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럽거쳐 육로 귀국
1910년 9월3일 그는 뉴욕에서 유럽행 SS 발틱 호에 오른다. 영국 리버풀에 상륙한 그는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을 4주 가량 여행한 다음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바이칼호를 거쳐 10월말경 만주를 지났다. 압록강을 건널 때 일본 관헌의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밟으며 이승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경의선을 타고 평양을 거쳐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뉴욕을 떠난지 1개월7일만인 10월10일 늦은 밤이었다.
6년만에 부친을 만난 이승만은 며칠동안 자신이 미국에서 겪은 일과 국내에서 일어난 일 등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부친 못지 않게 이승만을 반긴 사람은 부인 박씨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도 박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가 감옥에서 쓴 한시들 중에는 부인을 그리워하는 시가 여러 편 있는데 특이하게도 부인이 살림을 등한시하고 어른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며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며 박씨를 욕하는 시 한수도 포함돼 있다. 예전부터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두 사람은 결국 이승만이 귀국한지 2년만인 1912년 갈라서게 된다. 결별의 결정적 원인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후 불교에 심취한 박씨가 얼마 안되는 재산을 절에 시주해 버린 것이 이승만을 격분케 해 이혼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씨는 그후 혼자 양아들을 얻어 살았으며 6 25때 북한군에 피랍돼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승만도 외아들 태산이 이야기와 함께 부인 이야기는 거의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기존의 어느 전기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승만은 10월 중순부터 서울 YMCA 학생부 간사 겸 YMCA 학교의 학감으로 본격적 활동에 들어간다. 그가 맡은 일은 강연과 강의였다. 각종 집회에서 신앙강연을 하고 성경 연구반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서구사회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는 금방 그의 명성을 높여 놓았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독립을 역설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신앙중심의 강연에 몰두했던 시기였다.
당시 YMCA 학생이었던 정구영 전 공화당 의장이 75년 한국일보 기획 '인간 이승만 백년'에서 증언한 것을 보면 이승만은 영어와 같은 액센트를 사용해 선교사 같은 말투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도사나 목사의 설교 말투에 익숙지 않았던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신앙중심 강연몰두
'인간 이승만 백년'에서 정구영씨가 증언한 또 한가지의 일화는 이승만의 퍼스낼리티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정구영 소년이 이승만 학감에게 기도 문제를 가지고 따졌다.
"기도는 왜 합니까. " "기도라는 것은 내 영혼과 하나님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 "아멘은 뭡니까. " "유태말인데 나도 당신 기도에 동의한다는 뜻이지. " 이에 정구영 소년이 "하필이면 왜 유태말을 씁니까. 왜 동의할 수 없는 것을 동의하라고 강요합니까"라고 대들자, 이승만은 낯을 붉히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미국 유학으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된 이승만은 자신을 따르거나 최소한 자기에게 동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차갑게 대하는 특유의 성품이 이때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일생에 걸친 활동 중에 자신의 힘을 얻는 원동력도 되고 정적이나 반대파를 만들게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호불호를 분명히 하는 그의 성격도 함께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YMCA 학감 시절 그의 별명은 이굉장 선생 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수시로 "야 이거 정말 굉장하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데서 비롯된 것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학식에 대한 당시 학생들의 경외감을 담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승만이란 존재는 당시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많은 학생들은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유학을 가서 이굉장 선생처럼 돼야지 라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이승만을 줄곧 따랐던 임병직 전 외무부장관이나 그에게 다소 반감을 품었던 정구영씨도 이때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증언했다. 1911년 초여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이승만은 전국 전도여행을 떠난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기독교계 학교의 실태를 돌아보고 특별집회를 개회하며 지방 YMCA를 조직했다.
그가 YMCA 국제위원회에 보낸 보고서다. "우리는 5월16일 서울을 출발해 6월21일에 돌아왔습니다. 이 37일 동안 우리는 13개소의 선교본부를 방문했고 33회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참가인원은 7천5백33명입니다. "
전체거리는 3천6백㎞였고 기차, 선박, 나귀, 달구지, 인력거, 가마, 도보 등 당시의 거의 모든 운송수단을 이용한 대장정이었던 셈이다. 가을에도 걸어서 약4백㎞의 전도여행을 했다. 이 전도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이란 사람을 직접 접하게 된 기회였다는 점에서 우선 의미를 갖는다.
원래 남앞에 서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선천적으로 교육가나 정치가의 소질을 타고났던 이승만으로서는 일체의 집회가 금지된 가운데 유일하게 대중 앞에 서서 연설을 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YMCA 학감이라는 자리가 싫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의 고문이었고 그의 전기를 쓴 올리버박사는 이 무렵 이승만의 심리상태를 매우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는 (일본의 통치에) 적극 찬동하거나 적극 반대하지 않고도 일본인들 틈에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미 1904년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을 때부터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해오던 터였다.
감리교 한국대표로
그런데 이승만이 귀국한지 두어달이 지난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준공 축하식이 있었는데 조선총독 데라우치(사내정의)가 신의주를 향하여 출발하는 날이나 서울로 돌아오는 날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기독교계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소위 1백5인 사건 의 발단이다. 그래서 1911년 내내 기독교의 주요인사 6백여명이 검거됐다. 물론 식민지 길들이기의 일환으로 꾸민 조작사건이었지만 1911년 9월 윤치호를 필두로 이승훈, 양기탁, 유동렬, 안태국 등 애국지사들이 대거 검거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판결과 1백5인만이 유죄판결을 받아 1백5인 사건 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1년 가까이 계속된 이 일로 이승만은 신변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했다.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이름이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할 경우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도 있다고 일본측에 경고해 이승만은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1912년 3월26일 서울을 떠난다. (그 전에 그는 1912년 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기로 돼 있는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선출돼 있었다. 따라서 1백5인사건에 그가 연루돼 피신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도미행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어쨌든 귀국한지 17개월여만에 종교활동에만 힘쓰다가 독립운동과 관련한 변변찮은 일도 해보지 못한 채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떠나는 것으로 부인 박씨와도 사실상 이혼하게 된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