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8월 하버드대에서 석사과정을 끝낸 이승만은 또 고민에 빠졌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는 더 남아 있을 것인가.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나의 성격을 아는 부친은 나더러 조금만 더 있으라고 편지를 써 보내왔다. 그 흥분된 시기에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결과를 불문하고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른다. "(이정식 역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승만이 귀국을 하고 싶었던 이유중에는 하버드대 시절이 너무나 힘들었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다고 해서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더 있으면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그는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기숙하면서 신학수업을 듣는 한편 컬럼비아 대학 박사과정을 밟을 요량으로 우선 청강을 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이승만은 우연히 장로교 해외선교부 사무실에서 한국에 있을 때 안면이 있는 어니스트 F 홀 목사를 만난다. 홀 목사는 이승만이 한국에 있던 무렵 선교사로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홀 목사는 오랜 만에 만난 그에게 "요즘 무얼하며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자신의 근황과 장래 목표를 얘기하자  "당신은 유니온 신학교에 가서는 안되오. 프린스턴으로 오시오"라고 권고했다. 아마도 이승만은 종교사업보다는 정치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을 말했던 것같고 그 때문에 홀목사도 이런 권고를 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홀목사의 권고에 대해 "나도 뉴욕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프린스턴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신학엔 뜻없는 듯



얼마후 이승만은 홀 목사가 프린스턴에서 보낸 속달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기차표와 기차시간표 그리고 프린스턴 역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프린스턴으로 떠났다.


홀 목사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승만이 나오자 바로 그를 데리고 프린스턴 대학으로 갔다. 거기서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장 찰스 어드맨 교수와 프린스턴대 대학원장 앤드류 웨스트 교수를 각각 만나고 면접을 거쳐 입학 승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신학교에서 신학과목 일부를 듣는 한편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전후사정을 고려해 볼 때 이승만은 신학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기숙사의 편의를 제공받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프린스턴대 시절은 유학생활 중에서 이승만에게 가장 의미있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를 이승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즐거운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여러 사람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나의 그 후의 생애에 있어서도 참으로 귀중한 존재들이었다. "( 청년 이승만 자서전 )


다른 자료들을 보더라도 프린스턴 시절은 이승만의 정신세계를 급속도로 심화시켰다. 경제적 부담도 거의 없었으며 수많은 친구와 교수들을 깊이 사귀게 됨으로써 그후 그가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을 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일급자원들을 대부분 얻게 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로서는 홀 목사와의 우연한 만남이 인생에서 몇 안되는 행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 시절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사람 중에는 앞서 말한 어드맨 교장, 웨스트 원장을 비롯,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 총장과 그의 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이승만의 투옥 경험, 한국에서 기독교 교육에 힘쓰고자 하는 목표, 한국독립에 대한 열정 등을 보면서 상당한 애정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재학시절  2년 동안 신학생들의 기숙사인 캘빈 클럽에서 일체 무료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드맨 교장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진 않지만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어드맨 박사는 나에게 그렇게도 친절했다. 그가 나를 위해 베풀어 준 몇가지의 혜택은 내가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웨스트 원장에 대한 기억도 매우 호의적이다. "웨스트 대학원장도 나에게 헌신적인 친구가 되어주어 내가 대학원 과정을 성공적으로 밟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돌보아주었다. "


그러나 이승만이 프린스턴을 다니게 됨으로써 맺은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역시 우드로 윌슨 총장과의 친교일 것이다. "윌슨 총장과 그의 가족이 나에게 그렇게 친밀한 친구들이 되어주었고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그들이 한국과 한국선교에 대해 보여준 관심이었다. 그들은 나를 격려해주었고 내가 준비하고 있던 사업에 대해 희망을 주었다. "



강연회 추천도



이승만을 위해 윌슨이 1908년 12월15일 강연회를 열 수 있도록 써준 추천장을 보면 윌슨이 이승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이승만씨는 프린스턴 대학원의 학생이며 우수한 능력과 고결한 성품으로 우리들에게 호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놀랄만큼 자기 나라인 한국의 현상황과 동양의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서도 정통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세를 일반 청중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개진했습니다. 그는 애국심이 강한 청년으로 동포에 대해 열렬하고 유익한 일꾼입니다.


동양에 있어서 연구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 미국의 권익을 직접적으로 배우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나는 기꺼이 그를 추천합니다. 


윌슨 부인과 세 딸은 동방의 외딴 나라에서 온 이 건실하고 똑똑한 학생에게 따뜻한 애정으로 대했다. 윌슨의 가족들은 벽난로 주변에서 정담을 나누거나 피아노 주위에 모여 가족음악회를 열곤 했는데 이승만은 이런 자리에도 종종 초대되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테니스도 즐겼고 기숙사 학생들의 사교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물론 다른 동료들에 비해 10살 가까이 많은 33살의 늦깎이 이방인 학생이다보니 마냥 즐겁게 같이 놀 수는 없었겠지만 비교적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리에서 이승만은 주로 한국의 민요를 불렀다고 한다.


이승만은 2년만에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데 그것을 보면 박사과정 때도 공부는 매우 열심히 한 것같다. 1908년 첫학기에는 국제법, 외교론, 미국사(상), 1909년 봄학기에는 철학사, 미국사(하)를 비롯해 국제법과 외교론을 계속 수강했다. 1909년 가을학기에는 1789년부터 1850년까지의 미국사와 국제법을 공부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도서관에서 보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논문 작성에 들어간 이승만은 1910년 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1910년은 한일합방이 되던 그 해였다.



논문 대학서 출판



이 논문은 그후 웨스트 대학원장의 배려로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도 중립무역에 관한 권위자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논문의 인세로 1달러80센트 혹은 2달러25센트 짜리 수표를 받곤 했는데 그는 이를 쓰지 않고 한동안 기념품으로 보관했다.


1910년 6월14일 윌슨총장이 정계로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참석한 졸업식에서 이승만은 윌슨으로부터 직접 박사학위를 받았다. 웨스트 원장은 그에게 가운의 후드를 걸어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으로서 보다는 이승만 박사 혹은 이박사 라고 부르는 바로 그 박사 학위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첫번째 국제정치학 박사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미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졸업식날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날이 나의 준비단계를 종말짓는 날이었는데 나는 슬픈 감정을 느꼈다. 한국은 내가 나가서 일을 하여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을사조약 이후 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장래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조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또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 친구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명문대에서 박사까지 받은 이승만이 그냥 미국에 눌러 살기로 결심했다면 그의 인생경로는 어떻게 됐고 대한민국의 장래는 또 어떻게 됐을까. 실제로 학부와 석사를 마쳤을 때마다 그랬듯이 이승만도 이 문제로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가 박사를 받은 직후인 1910년 8월29일 조국은 경술국치(경술국치)를 당해 사실상 없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부모와 헤어져 미국으로 올 때도, 미국에 온 외아들 태산이가 디프테리아로 죽었을 때도 삼켰던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을 결심한다. 합방 나흘 뒤인 9월3일, 그는 울적하면서도 비장한 마음을 안고 고국을 향한 장도에 오른다.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