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6월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며칠 휴식을 취한 후 7월1일 교민단이 베푼 대통령 환영식에 참석해 상해임정에 관한 보고를 했다. 일본측 정보보고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상해의 재정이 곤란하니 미주나 하와이 교민들이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상해에서 있었던 분쟁을 간략히 소개하고 자신이 대통령을 사직하지 않은 까닭은 한성정부의 실체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상해에 오랫동안 머문 이유는 이동휘가 국무총리를 사직한 뒤 마땅한 후임자를 고르지 못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사조직 필요성 절감
이승만은 곧바로 교민단 내의 자기 사람들인 민찬호, 안현경, 이종관 등과 협의해 자신의 사조직인 '대한인동지회' 조직에 착수한다. 상해임정의 정쟁을 겪으면서 사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때문이다. 그리고 안창호의 흥사단이나 박용만의 독립단 등이 이미 미주 한인 사회 내에 사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견제하려는 동기도 있었다.
7월21일 동지회 발족을 공식선포하고 강령을 발표했다. 그 강령은 "본회의 목적은 상해의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대동단결을 도모하되 임시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거나 방해하려는 불충불의한 국민이 있으면 본회가 일심하여 방어하며 상당한 방법으로 조처한다"고 돼있다.
7월27일 창립대회를 겸한 제1회 동지대회에서 이승만은 상해상황에 대한 보고를 다시 한다. 여기서 이승만은 첫째, 이동휘가 제의한 국무위원제는 공산당 제도이므로 반대했더니 사직사태가 발생했다. 둘째, 박용만은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로 정부전복을 꾀하고 안창호는 국민대표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방해했다. 셋째, 앞으로 여러분은 경찰도 되고 군병도 되고 몽둥이도 되어서 악한 분자를 처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내용은 반이승만입장을 취했던 김원용의 '재미한인 50년사'에 나오는 말로 다소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전반적으로는 신뢰할만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렵 동지회는 박용만의 독립단과 무력충돌을 빚는다.
독립단 기관지인 '태평양시사'지에 "이승만이 상해에서 내부분열만 일으키고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 채 슬며시 사라졌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 발단이었다. 8월2일 동지회 부녀회원들이 독립단 하와이 지부장 겸 태평양시사지 편집인이었던 함삼여를 찾아가 기사정정을 요구했고 이에 함삼여가 정정을 거부하자 이승만을 지지하는 청년 수십명이 신문사를 습격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하와이 주민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여론은 악화됐고 한동안 가라앉았던 하와이 교민의 내분은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은 8월18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호놀룰루를 떠난다. 태평양회의 주요의제는 태평양지역의 평화구축이라는 차원에서 미국이 일본의 해군력 증강을 억제시키자는 것이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태평양회의에 대비한 치밀한 준비작업을 개시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일이 공식적인 것 임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정부가 승인된 상태도 아니었고 이번 회의에 공식 초청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돕던 INS통신의 윌리엄스를 통해 주요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한국이 일본의 억압에 맞서 펼치고 있는 다양한 활동을 소개했다.
공식성 확보를 위해 그가 두번째로 펼친 준비작업은 상해임정으로 부터 신임장을 받는 것이었다. 9월21일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답신이 임정으로부터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29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채택되었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군비축소회의에서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헨리 정, 고문관 프레드 돌프. "
이승만은 신임장을 받은 즉시 미국무부와 회의 사무국에 제출했지만 이렇다할 답신은 없었다.
독립문서 제출 못해
드디어 11월11일 회의가 열렸다. 애당초 일본의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미국은 일본에 대해 유화적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미-일 간에 감정이 악화돼갔다. 이런 차에 한국내 저명인사들이 서명을 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라는 문서가 미일간에 문제가 됐다. 이상재, 윤치호, 박영효 등 사회지도층 인사와 13도 2백60군대표, 귀족대표 김윤식, 황족대표 이강 등 3백72명이 서명 날인한 이 문서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것이다. 이 문서를 돌프는 휴스 국무장관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맞서 결국 회의에는 제출되지 못했다.
이승만과 많은 인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에서 한국문제는 공식 상정되지 못했다. 오히려 미-영-불-일 4국은 태평양의 현영토를 존중키로 한다는 협약을 맺고 1922년 2월6일 회의를 끝냈다. 일본은 해군력 제한이라는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한국지배를 다시금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실익을 챙긴 셈이었다.
이 회의의 실패가 대표단을 비롯해 이승만에게 준 좌절은 컸다. 국민전체로 보자면 독립의 희망이 멀어진 것이고 이승만 개인으로서는 자신이 견지한 외교노선이 정당성을 상실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는 곧 임정대통령 이승만의 권위상실로 이어졌다.
상해임정의 이승만에 대한 인식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상해에 와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데다가, 21년초 극에 달했던 내분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은 채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 것에 대한 섭섭함, 그리고 외교적인 실패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급기야 6월10일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토의에 들어간다. 제안자 오영선은 불신임 이유로 내정불통일, 외교실패, 조각불능 등을 꼽았다. 불신임안은 6월17일 17명의 참석의원중 반대의원 5명이 퇴장한 가운데 12대0으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임정에는 어디에도 불신임제도가 없었다.
이승만은 9월경 하와이로 갔다. 그리고 3.1운동으로 중단됐던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 사업에 집중적 노력을 기울였다. 9월 18일 기독학원 새교사 낙성식을 거행했고 11월에는 기독교회 신축 예배당 헌당식을 열었다. 이 때부터 1923년 한해는 이승만으로서는 비교적 조용히 보낸 기간이다. 굳이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면 학생고국방문단의 파송이다.
1924년 1월 이승만은 하와이를 떠나 다시 워싱턴으로 갔다. 이 시기는 미주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착 가라앉았다. 이런 가운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내몰기 위한 작업이 착착 진행된다. 4월에는 노백린 내각이 총사퇴하고 후임에는 이동녕이 들어선다. 6월 의정원은 대통령 사고안을 통과시켜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지명할 것을 미국의 이승만에게 요구했다. 대통령이 오랫동안 임지를 떠나있었으므로 이를 사고로 간주하겠다는 통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7월1일 국무원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한을 보냈다. "다시 헌법개정이니 대통령 대리니 하는 문제로 서로 시비-충돌하는 모양인데 슬프다. 상해에 있는 우리 인사들은 종시 이렇게 세월만 보내며 좋은 기회를 앉아서 잃어버리려 하는가. "
교민성금 송금 중지
이어 이승만은 상해로 보내던 하와이 교민단의 인구세를 더 이상 보내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이에 임정은 이승만에게 불법적 행위를 중지하라고 경고했고 이에 맞서 이승만은 다시 "극동에 있는 교민들로 부터는 한푼도 걷지 못하면서 미주교민에 대해서만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그동안 내가 임정대통령이니까 미주동포의 돈이 상해로 간 것이지 나를 쫓아내면 더 이상 미주 교민의 돈이 상해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결국 1925년 3월 의정원은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탄핵심판위원회는 3월23일 대통령 면직안을 가결하고 즉석에서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임정은 24년 가을 하와이로 가있던 이승만에게 면직결정을 통보하고 불복하는 경우에는 2개월 내에 제소하라고 통고했다. 5년 6개월여에 걸친 상해임정 대통령시절은 이렇게 불미스럽게 끝났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