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0주년 및 조선일보 창간 75주년 기념 특별기획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서울전이 1995년 2월5일부터 7일까지 한달여의 전시를 마치고 폐막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개막식에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비롯, 각계 각층의 주요인사들과 일반 관람객등 18만9천99명이 관람했다. 학계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승만 논쟁 을 불러일으킬 만큼 역사인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번 전시회 관계자들의 방담을 통해 전시회를 둘러싼 뒷얘기와 이번 전시의 의미를 진단해보았다. 조선일보사 안병훈 전무, 조갑제 월간조선부장, 원녕희 조사부장, 서건 사업부장, 이한우 문화부기자가 서희건 부국장의 사회로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주>


서희건 =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이 7일 폐막됐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이한우 기자가 계속 현장을 취재했지요. 전시장의 분위기가 궁금하군요.



자녀동반 인상적



이한우 = 전시를 시작하기 전에는 50년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이 주 관람객이 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시가 시작되고나니 청소년에서부터 노년층까지 골고루 전시장을 찾아 왔습니다. 특히 40대를 전후한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와서 역사를 설명해주는 이들이 많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관람객들과 인터뷰를 했었는데 하나같이 이승만대통령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을 막연히 독재자라고 해서 그동안 비판만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시장 전체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숙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희건 = 전시 기간 동안 줄곧 전시의 의도를 문제삼는 논란들이 있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이번 전시를 하게 된 배경과 의도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안병훈 = 북한의 경우는 없는 역사도 날조해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역사 조차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 풍조가 돼 있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큰 흐름 속에서 이승만이란 인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평가해보자는 차원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현창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요. 다만 그동안 학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이 사물을 단면만 보고 맹목적으로 비판을 일삼는 것에 몰두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이를 바꿀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논평은 항일투사, 건국대통령, 국부에서 친미주의자, 국토분단 주범,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때문에 광복 50년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현대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도 이번에 전시장을 찾은 많은 관람객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로 살아왔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서희건 = 우리는 일부 세력이나 편향된 학계의 시각으로 말미암아 건국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조갑제 부장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인물깊이 못 비겨



조갑제 =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대통령에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3년전 우연히 이화장에 들렀다가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그의 인격형성 과정에서 30세가 될 때까지 으뜸가는 조선인 으로 동양의 교양을 갖춘 후 서양 최고의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자주적인 태도가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소련군의 말단 장교로 한반도에 들어온 김일성과는 인간의 깊이 면에서도 비교가 안되는 것이죠. 그런데 아직도 이승만을 비자주적이고 김일성을 자주적이라고 보는 정반대의 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실증자료를 통해 이같은 허상을 타파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봅니다.


서희건 = 남한 단정론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은 비판 일변도였습니다. 분단의 주범이 이승만이라는 견해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안병훈 = 분명 이승만은 공도 많았고 실정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일부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는데 있습니다. 남한 단정론의 경우 아직은 판단을 내리기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출난 역사학자가 나온다고 해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는 사안이라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통일주도세력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이승만이 당시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이 강요한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였든가, 하지가 추진한 남한 좌우합작 정부를 물리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의 존재가 어떻게 되어있을까가 궁금하군요.



자료수집만 10년



서희건 = 전시장에서 내내 관심을 모았던 것은 전시장을 들어서자 마자 마주치게 되는 높이7.3m, 길이 44m의 거대한 연보였습니다.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요.


서건 = 그만한 크기의 사진을 만든 것은 국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경험이 부족해 전문업체 4곳이 합동으로 작업을 했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했습니다. 연보 만드는데만 꼬박 20여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전시회의 심벌이었습니다.


서희건 = 이번 전시는 조사부의 10년에 걸친 자료수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료수집 과정에서 겪은 애로 사항이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원영희 = 원래는 이승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근-현대사 자료 수집을 위해 86년부터 시작한 사업입니다. 미국과 일본등지에서 3개월 동안 총18만종의 사진과 문서들을 수집했습니다.  그 중에는 이승만과 관련해 처음보는 사진 4백여장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때의 사진을 중심으로 사진으로 보는 이승만대통령이라는 화보집을 추진했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이번에 전시회로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전시회를 위해 94년에 다시 미국과 일본 그리고 국내 기록보존소등에서 새롭게 자료를 수집해 뉴욕타임스 기사 1천2백40건, 굿펠로와의 서신등 귀중한 자료들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자료는 국내외 56개기관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생산적논의 필요



서희건 = 이번 전시는 불과 50년전의 사실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부끄러운 일이죠. 자료의 발굴 뿐만 아니라 연구의 시각도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극을 주었다고 보는데요.


조갑제 = 서정주 시인이 이승만 박사의 전기를 썼다는 사실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역시 당대 최고의 시인이 쓴 전기답게 이승만의 내면세계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점에서 압권이더군요. 특히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수구적 세계관을 버리고 개화파로 전환하는 대목은 인격의 대전환이라는 점에서 극적이더군요.


이런 소중한 자료가 재발굴된 것도 이번 전시회의 부산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공개적 논의없이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묵살해 오다가 그 문제를 표면에 떠올린 것도 이번 전시가 가져온 중요한 성과라고 봅니다.  찬성이나 박수 일변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것이 쟁점이 되고 토론을 거쳐 60년대식 평가가 아니라 90년대식 평가로 이어지는 생산적 논의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도 귀를 계속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희건 = 학단협이나 일부 사회단체의 이승만 부정 학술토론회와 두차례 소규모 시위도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취재를 했던 이한우기자가 느낀 소감을 말해주겠습니까.


이한우 = 이승만이란 인물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양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다만 학단협이 연세대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발표자가 "해방 직후 우리 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었는데 이승만이 미국을 끌어들여 이 모양이 됐다"고 발표하는 것을 보고 일부 학계의 이승만 평가라는 것이 현재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짐작케 했습니다.



40대 주부의 반박



서희건 = 전시장에서도 몇 차례 시위가 있었다죠.


서건 = 3.1절에는 서울대 학생 30여명이 와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곧 시민들과 격론이 벌어지더군요.  어떤 학생이 "여러분들은 어른이니까 다 아시겠지만 어린 학생들이 전시를 보고 역사를 잘못 알게 될까봐 겁난다"고 말하자 국민학생 아들과 함께 온 40대 초반의 아주머니가 "당신들이 하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만 우리 아이들이 당신들 얘기를 듣고 잘못 알게 될까봐 겁난다"고 반박하더군요.


안병훈 = 전문적인 평가작업은 이제부터 학계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문제 제기를 했을 뿐입니다. 다만 역사를 단면만 끊어서 보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큰 흐름 속에서 역사를 보고 인물을 살피는 성숙한 시각이 확산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서희건 = 지방에서도 전시 개최를 해달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건 = 일단 4월 하순부터 대구에서 전시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현재 주요 도시들에서 잇딴 요청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전국 순회전시도 계획중입니다.


<정리=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