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동지 박용만의 초청으로 이승만은 하와이에 왔다.  그러나 이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용만과의 대립이었다.


우선 이 무렵까지 박용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보다 6년 늦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박용만은 이승만과 같은 시기에 감옥에 있다가 1904년 도미,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링컨 고등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뒤 1906년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일찍이 독립운동의 방향을 무력투쟁에서 찾은 박용만은 1909년 네브래스카의 한 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1912년 첫 졸업생 13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11년에는 재미동포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도 하다가 12년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부의 기관지 신한국보 주필을 맡았다. 박용만이 이승만을 초청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때 사람들은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을 가리켜 3만이라 부르곤 했다(이름이 모두 "만"으로 끝난다). 세 사람 모두 감옥을 나와 보안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고, 박용만은 종종 "나의 일생을 이승만씨 하는 일에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박용만은 자신을 양계초에 비유하고 이승만을 강유위에 비유하곤 했다. 이승만의 옥중원고를 출간하기 위해 미국까지 가져 온 것도 바로 박용만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좋았던 관계가 극한적 대립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그 비밀은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한 후 벌이게 된 여러 사업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야기를 다시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로 돌려보자.


하와이에 도착하자 그와 가까운 감리교의 존 와드맨 박사와 한인사회 간의 갈등이 한창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랬다. 이승만이 도착하기 전인 1912년 10월5일자 일본계 신문에 일본 영사관이 한인구제금 7백50달러를 와드맨에게 주었다 는 보도가 발단이었다. 한인들은 한국인이 일본의 구제금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와드맨은 구제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한인기수학원의 보조금을 받은 것일 뿐 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인사회는 다시 일본돈으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맞섰다. 와드맨도 학교의 운영은 감리교단이 알아서 하는 것이니 한국인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맞섰다. 한인들은 자녀들을 한인 기숙학원에서 동맹 퇴학시켜 버렸다. 


이승만은 이같은 갈등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서 하와이에 온 것이었다. 하와이 한인이민은 1903년 1월13일 제1진 93명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의 신분은 주로 농민 하급관리 학생 광부 하인 망명자 등이었고 기독교신자들이 많았다. 중국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1882년 중국이민 배척법 이 발효되면서 중단되었고 이어 일본인 이민이 진출했지만 파업이 잦고 요구조건이 까다로워 농장주들이 기피하는 바람에 한국이 대상이 되었다. 이때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고종의 재가를 받아냄으로써 하와이 이민이 시작됐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회 관련 저서도



이렇게 시작된 이민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돼 그 수가 총7천2백26명으로 남자 6천48명, 여자 6백37명, 어린이 5백41명이었고, 남자들은 대부분 20세에서 30세 사이였다. 이들은 여러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에 열성이었고 농장 계약이 끝난 사람들은 도시로 나와 소규모 장사를 해서 경제적 기반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이 1913년이었으므로 한인들의 삶은 여러모로 나아져 있을 때라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한인단체 활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한인사회와 와드맨이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으로서는 입장이 곤란했다. 한인사회는 한인 사회대로, 와드맨은 와드맨대로 이승만이 자기편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한인사회는 와드맨과 대립적인 한인자유교회를 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목사로 일해주기를 기대했다.


한인들은 차제에 한국인 학교설립을 추진했다(한인학교설립에 적극적인 인물이 바로 박용만이었다. 박용만이 이승만을 초청한 이유도 바로 이렇게 해서 만들게 될 한인학교의 책임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와드맨과는 사실상 결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한인들은 학교설립계획을 계속하라. 단 나는 미국본토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와드맨이 양보해 한인기숙학원의 운영을 이승만에게 맡겼다(이와 관련해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김원용씨의 재미한인 50년사는 이승만이 한인사회를 설득한 공을 인정받아 교장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은 이런 와중에서도 1백5인사건의 전말을 폭로한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이승만은 교장을 맡자마자 1913년 9월 학교이름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고 학제도 대폭 고쳐 고등과 소학과 국어과 한문과를 따로 두었다. 9월20일에는 월간 태평양잡지를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그러나 1년후 와드맨의 후임으로 윌리엄 프라이 박사가 오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승만은 학교 운영의 전권을 장악한 뒤 한인교회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해 발언권을 높이고 있었는데 감리교의 입장으로서는 이승만의 이런 행동이 흔쾌할 수 없었다. 프라이는 부임과 함께 이승만에게 교회 일은 간섭하지 말고 교장으로서의 업무에만 충실할 것을 요구했다. 이 점은 이승만 자신이 월권 을 한 면도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또 한가지 요구가 그를 참을 수 없게 했다.  프라이는 한인들만 가르치지 말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곧 한국인들의 민족교육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한국인들을 개화시키고 개화된 한국인들을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 는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을 감안할 때 그것은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였다. 그는 감리교와 갈라서기로 결심한다. 그는 태평양잡지 를 통해 한인학교의 설립을 주창하는 한편 우선 학교 근처에 여학생 기숙사 부터 마련했다. 당시 기숙사 학생이었던 고 박에스더 여사는 이런 증언을 한 바 있다.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비로소 애국심에 눈을 떴습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모두가 울었어요. "


또 박여사는 이승만에 대해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려 이박사가 어떤 분인지 자세히는 몰랐어요. 그저 어른들이 애국자라고 해서 존경했을 뿐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말을 잘듣지 않거나 화가 나면 양볼을 부풀려 가지고 훅 훅 하고 불어대곤 했습니다. 어른들은 그분이 옥중에서 고문을 하도 많이 받아서 생긴 버릇이라고 하더군요. "


여학생 기숙사 사업을 마무리한 이승만은 이제 학교설립에 나섰다. 그런데 여기서 국민회와 갈등이 시작된다. 학교건립을 위한 모금이 진행중인 가운데 국민회가 국민회 회관 건축을 의결한 것이다. 경제사정이 넉넉치 않은 형편에서 한군데 힘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학교도 세우고 국민회 회관도 건립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14년 6월10일 박용만은 자신의 무력투쟁노선을 구체화하기 위해 국민회 연무부를 확대 개편해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독립군 병사를 기르는 병영 설립을 추진해 8월29일 아후 마누 농장에 대조선국민군단 병영을 완성했다.


국민회로서는 자금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에서 국민회를 규탄하는 장문의 논설을 자신이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실었다.



1차대전 발발



"대저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일반동포가 이해득실을 판단하여야 할 것이며 이 잡지 사업과 학생 기숙사 일이 잘못되거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또 그는 "사실을 말하면 국민회에 돈을 주어서 시루에 물 붓듯이 없애는 것보다 이승만에게 주어서 사업하는 것이 한인 전체에 유익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비판자들에 의해 분열주의자라고 비판받게 되는 첫번째 사건인 셈이다. 그의 글도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독선적인 분위기이다. 그리고 전체 상황을 보더라도 하와이 이민자들이 힘들게 돈을 모아 자기들 계획대로 쓰겠다는데 굴러온 돌 이승만이 그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에게 힘을 집중시킬 것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만 놓고 본다면 분명 이승만은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며 교민사회의 단합이라는 문제를 경시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한국에 결코 유리하지 않고 일본의 힘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회관건립이나 박용만의 군대양성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되지도 않을 일에 불필요한 돈을 낭비한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미국의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승만의 은근한 엘리트 의식도 작용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무력투쟁만이 독립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하와이에도 널리 퍼진 것이다. 박용만의 병영이 두달 만에 완공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옥중동지 박용만과의 관계가 숙적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