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생활은 크게 세가지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첫째가 교육 사업이고, 둘째가 교회 활동이며, 셋째가 교민 단체 활동이다.
박용만과의 갈등 끝에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이 우선 착수한 일은 여학생 기숙사를 확대해 1918년에 발족시킨 한인기독학원이다. 그러자 감리교가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에서 많은 학생들이 전학을 왔다. 당시 한인중앙학원은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후 인종혼합교육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며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채플시간에는 자신이 직접 설교를 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1918년 12월23일 감리교단과 완전히 결별하고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했다. 예배당 안에 태극기를 꽂아 놓고 예배를 보는 완전히 한국화된 교회였다. 그는 이 시기 동안 독립운동가로서 보다는 기독교 교육자로서 세월을 보냈다.
민족자결론에 고무
이 무렵 세계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한인사회도 각자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승만과 박용만은 대립적인 방책을 내놓았다. 이승만은 한국 내에 평화적 시위가 일어나야 한다고 본 반면 박용만은 무장봉기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는 이승만쪽으로 넘어가 있던 터였다.
1차대전은 1918년 11월11일 끝났다. 윌슨 미국대통령은 이미 그해 1월8일 의회에서 평화원칙 14개 조항을 발표하는 가운데 민족자결론을 주창해 약소국들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이승만도 여기에 상당히 고무됐음은 물론이다.
연합국은 1919년 1월18일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한인사회도 이 회의를 이용해 한국의 독립을 얻을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8년 12월1일 재미한인 전체회의를 소집해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평화회의 대표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1월6일 호놀룰루를 출발, 15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정부의 비자발급 거부로 결국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과 정한경은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차선책으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청원을 내는 것이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는데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2월25일자로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문을 보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지금도 일부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으며 또 상해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받게 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국내나 중국-노령 등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절대독립을 내세운 반면 국내 실정에 어두운 이승만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바뀌는 방안을 내세운데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청원을 낸 시기가 3.1운동 이전이고 청원의 기초자가 정한경인데다 사실상 미주 한인단체를 대표했던 국민회의 승인을 받은 것이므로 크게 문제삼는 것 자체가 다분히 이승만을 공격할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반대 주장도 있다. 재미학자 방선주씨는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출판부 간)에 실은 논문 이승만과 위임통치안 에서 "위임통치청원이 독립군의 견지에서 보면 반역 행위일 수 있지만 국제정치의 시각에서 보면 이 박사와 정한경의 위임통치안도 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문제는 3.1운동과 이승만의 관련성이다. 현재 국내학계의 연구자료에서 3.1운동과 이승만의 관계를 언급한 논문은 전혀 없다.
그래서 그후 여러 곳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나 국무총리로 추대될 수 있었던 사실에 대해 운이 좋아서, 안창호의 지원으로, 명문대를 나와서라는 정도의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설득력이 없다. 아무리 식민지 하의 임시정부라지만 3.1 운동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인물이 그후 국내외에서 생겨난 여러 임시정부에서 수반이나 국무총리로 지명됐다는 사실은 뭔가 다른 설명을 요하기 때문이다.
추대 뒤늦게 알아
특히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이 말하듯 그가 오직 분열주의자에다 트러블 메이커였다면 그가 아무리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들 그런 것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았을리가 없는데 그런 인물이 단번에 지도자급 인물로 떠올랐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3월21일 노령 지역의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이래 한달도 안돼 국내외 각처에서 조선민국임시정부 , 상해임시정부 (4월11일선포), 신한민국정부 , 한성정부 (4월23일 선포) 등 5개의 임시정부가 차례로 성립됐다. 각 임정별 요인 명단을 보면 이승만은 대한국민의회정부에서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에 이어 국무총리, 조선민국 임시정부에서 정도령, 손병희에 이어 부도령, 상해임시정부에서 수반격인 국무총리, 신한민국정부에서 집정관 이동휘에 이어 국무총리,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가 됐다(이중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 와 신한민국정부 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해도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체는 확인되지 못해 사실상 무시되고 있다).
이처럼 이승만이 실질적인 수반이나 그에 준하는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포항공대 고정휴 교수는 첫째는 구한말 개혁의 선구자이자 7년동안의 옥고를 치른 정치범 그리고 미국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청년 외교가이자 미국의 철학박사라는 명망 때문이고, 둘째는 독립과 관련해 한국민들이 막연히 미국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대감 때문이라고 밝히고있다. 그러나 3 1운동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인물을, 막연한 기대감과 그의 명성 때문에 분쟁이나 일삼던 인물 을 독립운동의 지도층들이 일시에 수반급으로 천거한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감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3 1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승만계열의 주장 또한 지나치게 이승만을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3 1운동과 이승만의 관계라는 문제와 관련해 학계는 앞으로 보다 많은 실증적 자료를 찾아내고 치밀한 연구작업을 거쳐 그 실상을 가려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튼 이승만은 자신이 국내외 곳곳의 임시정부에서 수반급으로 추대됐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부터 그가 집정관 총재, 국무총리 등의 추대사실을 알게 되는 4월말까지 그는 한인대회를 준비한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미국 언론에 대한 공작을 통해 한국의 자치는 아직 멀었다는 논지의 기사들이 잇따라 나오게끔 했고 미국인들의 일반적 여론도 대체로 이에 동정적이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이승만은 서재필과 상의해 4월14일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기로 했다.
대회는 예정대로 필라델피아의 한 소극장에서 당시 유학생이던 임병직(전 외무장관), 조병옥(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유일한(유한양행 창설자), 장기영(전체신부장관)등 한인대표 1백20명과 토머스 스미스시장, 네브래스카주의 노리스 상원의원, 미주리주의 스펜서 상원의원등 미국내 유력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한국위원회 설치
대회는 이승만의 지론이기도 했던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하자는 강령을 발표하고 끝났다. 대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소극장에서 2㎞ 떨어진 인디펜던스 홀까지 비를 맞으며 행진을 벌였다. 인디펜던스 홀은 그 때로부터 1백40여년전 미국이 독립을 선포했던 유서깊은 곳이었다. 임병직씨는 한 증언에서 "인디펜던스홀에 들어가 이승만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좌정하고 관장이 환영사를 한 후 이 박사가 금년 3월 대한 서울에서 반포한 독립선고서를 영문으로 낭독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한가지 에피소드는 당시 서울에서 선포된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낭독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썼다고 봐야 할 만큼 그 내용이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유사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뭔가 엉성한 가운데 애국심 하나로 벌인 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필라델피아 대회를 마친 이승만은 임병직과 함께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시 오하이오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임병직에게 자신의 비서로 일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임병직은 그것을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 5월초 이승만은 워싱턴의 한 빌딩에 사무실 두개를 구해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라는 간판을 달고 하나는 자신의 집무실로, 또 하나는 비서실로 사용했다. 이 사무실 개설을 통해 이승만이 한 일은 한국에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니 한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의 윌슨대통령을 비롯해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성과는 전혀 없었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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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