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위원부를 발족시킨 이후 미국정부와 의회, 그리고 언론을 상대로 한 한국독립의 로비활동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국보도 9천여건
구미위원부 법률고문을 맡았던 프레드릭 돌프 변호사가 1921년 1월15일자로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1920년 9월까지 18개월 동안 미국 신문에 실린 한국관련보도나 논평은 9천여건을 넘었고, 그중 일본편향적인 내용은 50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미국언론만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제압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를 얻는 데는 이승만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정이 문제였다. 신한민보 1920년1월6일자에 실린 중앙총회 재정결산서 를 보면, 1919년 1년동안의 총수입은 8만8천13달러이다. 당시 교민수 1만여명에다, 대부분 하층민 생활을 하고 있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액수이다. 이중 지출내역을 보면, 상해임시정부에 3만6백달러, 구미위원부 2천달러, 파리대표(김규식) 4천달러, 사회당 대표(조소앙) 4천달러 등이 명시돼 있다. 반면 1920년도 구미위원부의 지출총액은 6만5천여달러였다. 국민회가 보내주는 2천달러는 말 그대로 코끼리비스켓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에 소요되는 자금을 국내-외 한인들과 미국인들이 지원해주는 특별지원금에 의존해야 했다. 특히 박용만과의 갈등 이후 이승만 지지노선으로 바뀐 하와이 국민회는 국민회 중앙총회에 애국금을 내는 것 이외에 따로 이승만에게 특연이라 해서 비밀지원금을 보냈다.
이승만은 여기서 독립공채 발행을 구상한다. 이와 관련해 고정휴 포항공대교수는 그의 학위논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연구'에서 "이승만의 공채모집 구상은 제1차 세계대전기 미국정부의 전시공채 발행과 전쟁 종결 이후 에이레 공화정부의 미국내 독립공채 모금에 영향받은 바 큰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연리 6%, 거치기간 5년 조건의 공채 5백만달러 발행계획을 상해에 있던 안창호에게 제시했다. 이승만의 제안을 받은 안창호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공채발행법률안 국채통칙과 관련조례 등을 통과시킨 것은 1919년 7월16-17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혼선이 발생한다. 임시정부는 8월2일 국채통칙 등을 공표도 하지 않은 채 재무부령으로 미국의 국민회에 애국금 징수를 지시하고, 국민회를 징수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애국금은 바로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었다.
청약기간을 8월1일에서 11월30일로 정한 공채발행조례가 공표된 것은 11월20일이다. 기한만료를 불과 열흘 앞두고서였다.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물론 상해임정내 반이승만세력의 공작때문이었다.
당연히 공표될 것으로 생각한 이승만은 9월4일부터 김규식과 공동서명한 공채발행을 시작했다. 종류는 10-25-50-1백-1천달러 등 5가지였으며, 미국이 한국을 승인한 뒤 1년 후에 상환한다는 조건이었다. 반면 상해에서 공표된 공채발행조례 는 1백원-3백원-5백원 3종이었으며, 연리 5%에 5년 거치 30년내 상환이었다.
상해임정내 반이승만세력과 미주국민회는 상호연계해 이승만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공표되지도 않은 법령에 따라 외국에 빚을 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표된 시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승만을 몰아세우려는 의도 자체가 너무 강했다.
노령임시정부 이탈
상해임정이 공채발행조례를 공표하기 직전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10월28일자에 실린 공채발행 비판을 보자. ①독립을 찾기도 전에 정부의 이름으로 빚부터 지려는 것이 실책이요, ②장수는 없이 외교사업만 갖고 빚을 지려는 것이 큰 실책이요, ③눈 앞에 곤란만 생각하고 국가가 성립되기도 전에 파산당할 것이 뻔한데 큰 화를 일으키는 것은 실책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다. 물론 이승만 자신도 5백만달러 모금이 쉬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다만 목표가 커야 얼마라도 모일 것이고, 또 한국의 원대한 독립의지를 미국민들에게 알리는 홍보효과도 기대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공채발행과 함께 애국금을 폐지한다고 발표하고 미주내에서 거두는 모든 돈은 구미위원부로 보내라고 발표했다. 이승만의 논리는 공채발행은 집정관총재 자격(후에는 임시대통령)으로 반포한 것인 반면, 애국금은 (3개 임정이 통합되기 전의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인 이승만의 밑에 있는) 재무총장 최재형의 명의로 된 것이니 당연히 이승만이 포기하라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애국금에 상당한 의존을 하고 있던 국민회로서는 이승만의 이같은 요구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국민회는 정당방위의 논리를 내세워 "우리는 상해임정의 명령에 따를 뿐, 그 일부요, 전체는 아닌 구미위원부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맞섰다.
이 싸움은 해를 바꿔 1920년 2월24일 새로 재무총장에 취임한 이시영이 애국금을 폐지하고 재정을 구미위원부에 집중시킬 것을 지시함으로써 끝났다. 1921년 한해동안 구미위원부의 수입내용을 보면, 총수입 7만1백90달러중 공채모금은 4만6천4백달러로 3분의 2를 차지했고, 상해에는 1만3천달러를 보냈다. 모금방식의 근대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공채 발행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 보낸 액수가 문제였다. 국민회의 경우, 1919년에 보낸 것이 3만6백달러였으므로 상해에서는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 과정에서 분파주의에 넌더리를 내게 된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어렵게 출발한 통합임정은 상해에서 온갖 분파들이 정쟁을 일삼았다. 평안도세력과 기호세력의 지방색, 무력투쟁론과 외교투쟁론, 미국중심과 노령-중국중심,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노장파와 소장파 등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반목을 일삼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용만은 외무총장에 임명됐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아예 북경으로 가서 반임정투쟁을 벌였다. 사실 상해에 반이승만세력이 확산되고 국민회가 이승만에게 무조건 반발한 것도 박용만의 작용이 컸다. 그리고 노령임시정부는 통합과정에서 법통은 한성정부를 이어받고 임정위치는 상해로 정해진 데 반발해 통합임정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다.
이 모든 분란이 현재 이승만의 책임으로 학계일각에서는 얘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 이승만은 상해에 가지도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소련과 밀약을 맺고 연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동휘계가 볼셰비키정부가 준 자금 60만루블을 횡령한 일이다. 결국 각부총장이 사퇴하고 상해임정은 와해일보직전에 처하게 된다.
선창 속 숨어지내
이런 상황에서 1920년 3월22일 의정원은 대통령 래도 촉구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4월21일 상해에서 미국으로 온 자신의 측근 현순(현순)으로부터 상해사정을 전해들은 이승만은 상해행을 결심한다. 6월초 샌프란시스코로 간 이승만은 6월22일 하와이행 마우나호에 올랐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그의 목에 현상금 30만달러를 걸었기 때문에 매사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1919년 당시 일본경찰의 요인 사찰보고서에는 이승만이 3.1운동을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돼 있다. 그에게 현상금이 걸린 것은 이 보고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승만은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했으나, 곧바로 상해로 떠나지 못했다. 일본의 감시가 심했고, 따라서 배편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와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장의사 주인 윌리엄 보드윅의 별장에 숨어 지내며 안전한 배편을 모색했다. 이승만은 그의 비서 임병직과 함께 11월12일에야 상해로 떠나는 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와이에서 죽은 중국인들의 유해를 싣고 상해로 가는 네덜란드선적 웨스트 하이카호였다. 문제는 정식여행이 아니라 보드윅의 주선에 의한 밀항이라는 데 있었다. 두 사람은 선창속에 숨어지내다 발각돼 이승만은 하루에 네 시간씩 망을 봐야 했고, 임병직은 갑판청소를 했다. 이렇게 지내며 12월8일 두 사람은 마침내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해에서 그를 맞아준 것은 다시 한 번 그에게 환멸을 안겨준 극단적 분파행태였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