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여러 차례에 걸쳐 매우 운이 좋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만일 이승만이 3 1운동 이후 생겨난 각종 임시정부들에 의해 수반급 지도자로 추대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그로서는 하와이에 있으면서 윌슨과의 친분을 내세워 한국의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해왔기 때문에 미국 본토로 온 후 아무런 외교적 성과도 얻지 못한 것은 정치적 부담이었다. 하와이로 돌아갈 경우 "그동안 윌슨과 친하다는 등의 얘기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반대파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국내외 임시정부들에 의해 수반급 지도자로 추대되면서 그 부담을 피하는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자신의 카리스마를 재확인받고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가 열린 4월 중순이 훨씬 지난 뒤인 5월 하순경에야 당시 배재학당 신흥우 교장이 미국에 와서 알려줌으로써 자신이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된 사실을 알았다.  그 전에 그는 다른 곳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됐다는 사실을 전해듣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이 집정관총재로 선임된 한성정부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5월 초순부터 그가 활동을 시작한 워싱턴 한국위원회는 곧 집정관총재 사무실의 기능을 겸하게 된다.


이 무렵 이승만은 상당히 중요한 대미외교활동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전까지 미국대통령이나 국무부를 상대로 했던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자 여론조성을 통한 압력,  즉 우회로에 의해 미국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행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그는 언론을 활용하는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앞서 있었지만 여론 지도층을 조직화해 외곽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접근법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활용됐다.


5월18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래드라는 미국인 교수가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음모에 의한 것이며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다고 주장한 기사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 논설이 실려 있다. 래드의 글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비판한 이 글은 상당히 장문이며 모든 면에서 한국이 독립능력이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NYT에 반박논설



과거 한국을 근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과거 일본을 근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처럼 공정치 못한 것이다.  일본 자체를 예로 들자면 과거 페리 제독이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수많은 분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으나 한국정부는 통일된 완전한 통치를 즐기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 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 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일본이 이룩한 것을 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낸 모든 물질적 성과는 사실 한국인들이 스스로 시작한 것이었다. (중략) 


한국인들은 과거 왕조시대에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주택과 감옥은 한국을 방문했던 모든 유럽인들이 놀랄 정도로 청결했다. 한국인들의 도덕성은 다른 어느 동양국가들보다 뛰어나며 한국을 통치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명백히 우수하다. 래드 교수는 일본 고리대금업자의 손아귀에 떨어진 한 한국인이 빌린 돈을 애인에게 허비한 얘기를 했다.


물론 그런 일은 미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과연 미국인들이 자치능력이 없다고 하겠는가. 



언론을 통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이승만은 여론 지도층을 조직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5월5일 발족한 것이 미국내의 유력한 인사들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한국우호연맹(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이다.  여기에는 회장을 맡은 플로이드 톰킨스 목사를 비롯해 유력인사 19명이 참가했으며 "한국의 독립사업을 지원하며 한국 안에서 당하는 일본의 압박과 학정을 항의하고 한국실정을 널리 알릴 것"을 연맹의 사명으로 삼았다.


5월16일에는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리딩시에서 우호연맹을 발족시켰고,  6월6일에는 워싱턴에서도 생겨나는등 1919년 한해동안 미국내 19개 도시에 한국우호연맹 이 조직됐으며 1920년에는 영국에도 연맹을 조직했다.




대통령 번역 물의




이승만은 1919년 한해를 주로 이런 연맹들을 만들고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연맹활동을 독려하는데 보냈다. 이렇게 해서 맺게 된 미국내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은 그후에도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적 자원이 됐다. 그들 중에는 변호사인 존 스태거스와 프레드릭 돌프 그리고 INS통신의 제롬 윌리엄스 기자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모두 이승만의 평생 친구가 됐으며 모든 일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돌프는 한국위원회의 법률고문이었고 윌리엄스는 PR 고문이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일 중에 하나가 소위 자칭 대통령 문제이다.  그는 여러 임정에서 추대된 직함 중에서 최고위직인 집정관총재에 애착을 가졌던 것같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 보내는 문건에서 집정관총재를 Chief Executive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President라고 번역한 것이다. 미국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으로서는 일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미국내 활동의 편의상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그후 정적들에 의해 대통령병 환자,  자칭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는 발단이 됐다.


이승만은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내는데 있어 천재적인 수완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자원을 극대화하는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무모할 때도 있었고 비판자들에게는 허풍쟁이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큰 줄기에서 보면 이승만의 그런 행동은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상해에서는 여러 임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활발하게 추진됐다.  한성,  노령,  상해 3개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이 논의되다가 여기서 정통성 논쟁이 발생했고 결국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잇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성정부는 이승만을 최고지도자인 집정관총재로 추대해 놓은 터였다.


이 논쟁 과정에서 이승만이 미국에서 대통령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됐다. 반대진영과 이승만 사이의 중재를 맡았던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어느 정부에도 대통령이라는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면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행사를 하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미국으로 보냈다. 여기에는 일면 재미한인사회의 라이벌인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안창호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이미 나는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한국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라고 답했다.


이 당시 이승만은 비서인 임병직에게 "아니 그러면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하란 말이냐"고 짜증을 내곤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승만은 그후에도 한동안 한글로는 대통령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집정관총재 를 사용했다.



구미위원부로 개칭



9월6일 이승만은 우여곡절 끝에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곧바로 워싱턴 한국위원회를 구미위원부 로 개칭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미국으로 온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만여명의 미주한인들이 한국독립운동에 경제적으로 기여하는데 결정적 기구가 된 구미위원부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9월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전체 한인회의를 열고 1주일 동안 한국독립의 방안을 논의했다. 여기에는 필라델피아시장 토머스 스미스,  SD 스펜서 상원의원 등 유력인사들이 참석해 한국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는 안정적 재원확보를 위한 독립공채 발행이 기존의 교민조직이던 국민회의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었고 상해에서는 대통령이 되고도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논란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