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게는 외교 제일주의자, 외교 만능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늘 붙어다닌다.  그러나 그가 맹목적으로 무장투쟁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무장투쟁론은 우선 미국에 있던 그로서는 현실적으로 택하기 어려운 방법론이기도 했지만, 일본의 군사력과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단순히 군사적 패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내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보았던 측면도 있다.



무장투쟁으로 연결



실제로 그는 이봉창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거사소식을 전해듣고서도 임정의 김구 주석에게 보복만 야기할 뿐인 그런 행동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에 들어가자 이승만은 미국내 한국청년들을 비밀리에 미군 특공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정보국)에 참여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물론 이승만의 속셈은 그것을 통해 임정승인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정승인을 중국-노령지역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지원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이 점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서둘러 광복군을 강화해 국내진격에 참여함으로써 임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김구의 구상과도 연결된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미국은 즉각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듬해 1월 스틸웰 중장을 중국-버마-인도 전구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중일전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당시 중국전선에 지상군을 투입하지는 않고 곤명을 비롯한 중국 남부지역에 공군을 주둔시켜 중국군을 간접지원하는 한편, 이들 전구에서 미국의 작전을 원활하게 지원할 수 있는 첩보부대의 창설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해서 1942년 3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정보조정처(Coordinator of Information)를 만들고, 그 산하에 101부대를 창설했다가 첩보관련 부대들을 통폐합해 그 해 7월 대외 첩보공작기관인 OSS를 공식발족시켰다. 설립자는 뉴욕의 변호사 출신인 윌리엄 도노반 소장이었고, 이승만과 친분이 있던 굿펠로우도 설립에 관여했다.


도노반은 중국에서 오래 지냈고 한국에 대해서도 비교적 지식을 가진 중국통 엣선 게일에게 책임을 맡겼다.  게일은 이승만, 서재필, 한길수 등 미국내 한인 독립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을 OSS와 협력할 수 있는 적임자로 꼽았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이 1941년 초 출간한 영문저서 일본내막기가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일본을 상대로 한 첩보공작을 펼치는데 있어 그 책을 통해 일본의 전쟁심리를 탁월하게 분석하고, 일본의 미국공격을 예측했던 이승만에게 기대를 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OSS의 임무는 포로의 심문과 적 문서 번역, 적 방송 및 무전청취 등을 통한 적 정보 수집, 적 점령지역이나 그 후방에서 현지주민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유격대를 통한 적 시설 파괴공작 등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본내막기 계기



OSS의 창설 목적 중에는 장기적으로 일본을 공격하게 될 경우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를 전진기지로 삼을 수 있다는 전략적 고려도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과 굿펠로우는 한국인 청년의 OSS 참가와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수립에 착수했다. 당초 계획은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인 청년 1백여명을 선발해 소정의 비밀훈련을 마친 후 적당한 시기에 임무를 수행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내 한국인 2세나 3세중에 일본어에 능통한 청년을 모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극비리에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 중남미에까지 요원을 파견해 적격자를 추려냈다.


한국인 OSS 대원 제1호로 선발된 사람은 재미유학생 장석윤이었다. 아무래도 2세나 3세보다는 유학생이 일본어에 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OSS 대원이 된 인물들 중에는 장기영, 이순용, 정운수, 유일한, 김길준 등 장차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이 OSS에 한국인 청년들을 가담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임정승인 때문이었다.


임정승인을 받아내기 위한 이승만의 노력은 정말 집요했다. 1994년 12월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관련 문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미 국무부에 임정승인 촉구 서신을 보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친한파 미국인들을 통한 대의회 로비를 통해 1942~1943년 2년 동안에만 질레트, 토미, 챈들러, 체스너트, 알렉산더, 오다니엘, 터넬, 코넬리 상원의원, 윌리엄스, 스테저스, 클레버그, 블름, 벡워드, 화이트, 질리 하원의원, 스미스 예산위원장 등 상당수 미 상하원 의원들이 미 국무장관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게끔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은 결국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광복군 전투력 향상



1942년 미국에서 시작된 이승만과 OSS의 군사적 합작은 광복군과 OSS의 군사합작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래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3월15일 광복군 대표 김학규와 중국 곤명의 미군 제14항공대 사령관이자 주중 OSS 최고책임자 클레어 셴놀트 소장 간에 한미 군사합작에 관해 합의를 보았다.


광복군과 OSS의 합동작전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돼 광복군의 전투력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8월9일에는 OSS 총책임자 도노반 장군이 직접 광복군 제2지대의 훈련성과를 점검하고 김구, 이청천, 이범석 등과 함께 OSS 대원의 국내 투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로 다음 날인 10일 일본의 항복의사 표명사실이 전해지면서 광복군 OSS 대원의 국내 투입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승만에 의해 사실상 한국인의 OSS 참여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국내에는 이와 관련된 이승만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한우 기자>



* OSS 1호 장석윤옹 증언


/"나라위해 일하라" 이 박사 입대권유/ 버마서 일 포로 심문/ 임정 연락책도 맡아 /


"이승만 박사를 처음 본 것은 1925년 뉴욕에서 교민을 상대로 한 연설회에서였지. 그 때 이박사가 교포들은 단결해라, 한국독립을 언제나 생각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하라, 2세들에게 독립정신을 철저히 교육시키라 등의 내용을 강조했었어. 그러나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건 42년 3월 워싱턴 한인 자유대회 때였지. 나는 당시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하고 몬태나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자유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뉴욕에 갔다가 이 박사와 정식 인사를 했어. "


서울 목동의 단칸방에서 만난 제1호 한국인 OSS 대원이자 유일한 생존자 장석윤옹(91)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유대회가 끝나고 막 나가려는데 이 박사가 부르시더니 조만간 연락을 할테니 다시 워싱턴으로 와주게.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해줘야겠어 라고 말하시더군. 그래서 3월 중순 몬태나로 돌아갔는데 1주일 만에 전보가 와서 다시 워싱턴으로 갔더니 OSS에 입대하라고 하셨어. "


이렇게 해서 장옹은 미군 최초의 OSS 대원이 되어 다른 대원 20명과 함께 특공훈련을 받았다. 대원의 대부분은 미군이었고 중국계 3명과 폴란드계 1명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난 37세였는데 혹시 나이가 많다고 안될 것같아 33세라고 속였어. 훈련은 지금은 대통령별장이 있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실시됐는데 2개월동안 받았지. "


훈련을 마친 장옹은 인도-버마 접경지역의 차보아에 있는 101지대에 배치됐다.


여기서 그는 일본인 포로를 심문하고 버마 청년들에게 게릴라 훈련을 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부대 몰래 나는 이박사와 임정 간의 연락업무도 수행했어. 그때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사서함을 갖고 있었는데 이 박사가 사서함으로 편지를 보내면 내가 차이나타운의 중국인을 사서 임정에 전달토록 했지. "


당시 이승만과 임정이 주고받은 내용은 주로 미국의 동향과 독립군 현황이었다. 44년에는 중국 중경으로 직접가서 김구 주석과 접촉을 하기도 했던 그는 그해 7월 워싱턴으로 귀환명령을 받는다.


미국으로 온 장옹은 OSS의 한반도 침투작전에 앞서 남양군도에서 포로가 된 한국인 노무자 2백여명이 수용돼 있는 위스콘신주 매코이 수용소에 침투해 한국내 사정을 알아내고 요원 후보를 물색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해방이 되던 해 11월16일 미군 군속 신분으로 귀국한 그는 정보참모부(G2)에서 일하다가 1950년 5월19일 치안국장을 거쳐 1951-52년 내무차관과 장관을 역임했고 강원도에서 3-4대 민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