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려던 이승만의 계획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한햇동안 그는 프란체스카를 만나게 된 것 이외에 유럽 각국을 돌며 한국독립에 대한 지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의 생애 전체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련과의 연대를 추진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과정은 엄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광복 이후 그가 보여준 일관된 반공노선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2월초 제네바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던 이승만은 3월6일부터 9일까지 일시적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다. 방문목적은 그가 국제연맹에 일본의 만주점령에 관한 리튼보고서의 사본을 열람케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한 이후 파리에 가면 그 보고서를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그는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회장으로 있던 임병직으로부터 앞으로 1년간의 활동비를 보장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미-영-불에 실망
그후 제네바로 돌아간 이승만은 4월25일 미국 총영사 프렌티스 길버트와 오찬을 갖는등 여러 지역 대표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말로는 한국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실질적 조처는 아무 것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도 한국문제에 관한 한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승만으로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소련의 도움을 얻기로 결심한다. 국제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의 만주침략은 소련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등지에 있던 한국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접촉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빈에서는 그의 옛친구인 빈 주재 중국대사 동 박사가 소련 대사와 그를 제국호텔로 초청해 만찬을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동박사는 일본의 점증하는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 대륙의 공동전선이 필요하며 이런 전선을 펴는데 있어 이승만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강조했다. 소련대사 페테르프스키가 모스크바로 타전한 결과 비자가 발급됐다. 도착한 첫날 그는 외무부격인 외무인민위원회에서 나온 한 청년의 방문을 받는다. 그 청년은 이승만에게 당장 소련을 떠나줄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비자를 내보이며 정당한 입국 임을 항변했으나 그 청년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그는 하루 동안 만이라도 모스크바에 머물게 해줄 것과 외무인민위원회로 자신이 가져온 편지를 전달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래서 겨우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그날 밤 중국대사관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에 철도협상을 위해 일본대표가 모스크바에 와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승만을 서둘러 추방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밤 그는 3등열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왔다.
모스크바의 냉대. 물론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더한 냉대를 줄곧 받아왔지만 이 때 모스크바를 방문해 받은 냉대는 소련에 대한 거부감을 굳히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애당초 이승만은 청년시절부터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이승만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19세기말 조선의 식자층 사이에 널리 읽힌 동경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국제정세관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당연히 이승만도 이 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점은 그가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을 보더라도 쉽게 확인된다.
조선책략에 나타난 기본적인 조선의 외교전략은 러시아세력을 한반도를 노리는 유일한 세력으로 보고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이음으로써 자강을 도모하라는 것이 골자다. 기본적으로 이승만도 여기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함으로써 강대국으로 떠올라 한국을 병탄했기 때문에 기본골격이 약간 변모됐을 뿐이다.
1930년대 당시만 해도 이승만이 공산주의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미국의 체제야말로 한국이 받아들여야 할 모델이라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정에서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극심한 갈등을 겪은 직후인 1924년 4월23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그의 글을 보면 이 무렵 이승만이 갖고 있었던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공산당 사회당 등 명의로 의견을 나누지 말고 자유의 목적으로 한족당을 이루라. 오늘날 우리의 제일 급한 것이 자유라. 자유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원대로 할 수 있으되 자유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할 수 없으리니 세계적 주의가 비록 크고 좋으나 우리는 민족이 먼저 살고야 볼 일이다. "
이처럼 러시아 세력 자체에 대한 견제 심리와 공산주의에 대한 다소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던 차에 마지 못해 러시아에 기대려 했던 이승만이 모스크바당국으로부터 냉대를 받고 재차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견해를 다지게 됐음은 어쩌면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이승만의 반공노선이 언제부터 본격화됐는지의 문제는 광복후 정국을 다루면서 언급할 예정이다).
동지들 까지 외면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이승만은 8월10일 렉스호를 타고 16일 뉴욕에 도착해 한인사회를 돌며 제네바 회의 결과를 설명한 다음 10월경 호놀룰루로 갔다가 1934년 봄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국 각지를 돌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강연회를 계속했다. 10월8일 뉴욕 몬트 클레어호텔에서 윤병구목사의 주례로 프란체스카와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은 1935년 1월24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 이후 이승만의 활동은 그가 1939년 4월8일자 태평양주보 에 쓴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1935년에 구미를 들러 호놀룰루로 온 후로 교회나 사회의 내막을 완화주의로 교정하기를 바라고 일년반을 두고 힘써 오다가 필경 또 싸우지 않고는 되지 못할 것을 간파하고 그때부터 교회와 도무지 간섭을 끊고 상관않기로 결심하여 글과 말로 여러번 선언하였으나 40여년 적공하여 오던 우리 민족운동을 어찌 졸지에 거절하고 말고자 함이였으리요. 다만 여러번 풍파를 지낸 결과로 새로이 깨달은 바 내가 혼자 인도자 책임을 가지고 동포의 재정을 모손(닳거나 줄거나 하여 없어짐)하며 독립은 회복하지 못하고 보니 자연 내게 대한 악감이 심해서 내 신분에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고자 하는 일을 해갈 수 없을 만치 되고 보니, 차라리 내가 물러 앉으면 다른 사람들이 애쓸 기회도 있고 재정도 거두어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가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한 것이니, 독립을 못할지언정 동족간에 싸우지는 말아햐 하겠다는 각오를 얻게 된 까닭이다. "
이 글을 쓴 1939년 4월 무렵은 하와이 국민회가 그를 통렬히 비난하고 있었고 그의 동지들까지도 긴 세월에 걸친 헛된 투쟁과 희생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사실상 하와이를 도피하는 차원에서 워싱턴으로 가던 길에 쓴 글이다. 그의 측근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도 이승만전기에서 이 무렵을 "이승만에게는 암흑의 시절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청년시절 감옥에서 당한 후유증으로 중단했던 서도를 시작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옛날의 필치를 되찾는데는 많은 노력이 들어가야 했다. 자신의 시름을 달랠 겸 여가가 생길 때마다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는 자신의 필치를 상당히 회복했다.
일본 내막기 저술
그리고 동포들 사이에서 궁지에 몰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혼자서 하는 것, 집필이었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을 둘러싼 국제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폭로하고 그것을 제어하는 차원에서 한국의 독립이 절실하며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을 준다는 자신의 평소 전략논리를 확산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40년 한해는 거의 이 책을 완성시키는데 보냈다. 그것이 다름 아닌 1941년 초 출간된 "Japan Inside Out", 즉 일본내막기 이다.
그의 책에 관해 펄벅여사는 아시안 매거진에 기고한 서평에서 "그는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를 이야기할 때 미국인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경고를 해주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인에 대한 개인적 증오는 조금도 없고 다만 일본인의 심리상태가 전인류에 대해 얼마만큼 위험한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