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임정대통령에서 면직당한후 20년대 말까지 이승만의 활동은 그의 전생애를 통틀어 가장 침체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저 한인기독학원을 중심으로 한 교육사업, 한인기독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업, 그리고 대한인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정신 고취사업 등을 하며 무료하게 세월만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간혹 자신이 관여했던 태평양잡지에 계몽성 잡글을 기고하는 정도였고 그것들도 젊은 시절 글에서 보였던 탁월한 국제관이나 열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활동 자체가 위축된데 따른 것이 아니었나 보여진다.


1929년 10월5일부터 1930년 1월8일까지 3개월동안 미국 본토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다시 무료한 생활은 반복됐다. 어떤 면에서 평화로운 국제정세가 이승만의 필요성을 높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  1932년 1월 상해사변 등 중국과 일본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다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하와이 동지회에서는 다시 이승만이 활동할 수 있는 호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했다. 이 무렵 이승만은 1931년 11월 로스앤젤레스로 왔다가 1932년 봄 부터는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다.



독립탄원 전권대사



1932년 11월10일 김구가 주석을 맡고 있던 상해임정은 국무회의 결의를 통해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이승만은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인정했고 특히 김구와는 특별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12월23일 뉴욕을 출발해 1933년 1월4일 런런을 거쳐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과 함께 6일 중국대표 WW 엔,  AP통신 특파원 프란츠 립시 등을 만나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주요의제가 만주국의 지위문제였으므로 이승만은 이 지역에 있는 한국민들을 중립국민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려 했다.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주민들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수립된 것이라며 억지주장을 펼쳤고 이승만은 2월7일 일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글을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그 내용이 워낙 논리적이고 치밀했기 때문에 각국 신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이승만이 기대했던 한국문제의 정식의제 상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제네바행은 외교임무에서는 실패했지만 평생의 반려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로 의미를 가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이승만이 국제연맹과의 다양한 접촉시도로 한창 바쁘던 1933년 2월21일이었다. 오스트리아 처녀 프란체스카 양(당시 33세)은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고 귀국하던 길에 제네바를 방문, 2월20일 레만 호반에 있는 드 라 뤼씨 호텔에 묵었다. (과거에 프란체스카를 호주댁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 프란체스카는 1900년 6월15일생으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교의 인서스돌프읍에서 철물상을 하던 중류가정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업학교를 마치고 농산물관리소에서 일한 적이 있던 프란체스카는 스코틀랜드에서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아들이 없던 까닭에 철물점을 아버지와 함께 운영하느라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5년 한국일보 시리즈 '인간 이승만 백년' 97호에서 "재혼설은 낭설이며 이 박사와의 결혼이 첫결혼이다"고 밝힌 바 있다. )



중류가정의 막내딸



호텔에 투숙한 다음날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찾았다. 두 사람은 4인용 식탁에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식당이 만원이었다. 이때 지배인이 한쪽을 가리키며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는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두 사람은 승낙했다.


곧 환갑을 바라보는 동양의 노신사가 합석했다. 어머니는 큰 딸이 낯선 남자와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탐탁하지 않았지만 "노신사인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안심했다고 한다. 물론 그 노신사는 이승만이다. 이 만남이 장차 오스트리아의 시골처녀를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영부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프란체스카의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을 보면 첫 만남부터 그는 이승만이라는 이 동양의 노신사에게 매혹된 듯하다. 서툰 프랑스어로 "본 아뻬띠(맛있게 드세요)!"라고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프란체스카는 회고하고 있다.


바로 다음날 제네바의 라 트리뷴 도리앙 지에 이승만의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시골처녀에게는 어제 우연히 합석한 바로 그 사람이 신문에 크게 날 만큼 유명인사라는 것 자체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그 기사를 오려 스크랩을 한 다음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그 보답으로 이승만은 차를 대접했다. 그후 어머니 몰래 두 사람은 잦은 데이트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눈치를 챘다. "돈이 없어 식사 대용으로 날계란에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나이많고 가난한 동양인"에게 딸이 마음을 쏟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서둘러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이미 시작됐고 몰래 서신왕래를 계속했다. 그리고 7월경 모스크바로 가던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들른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들의 사랑은 무르익었고 1934년 10월8일 마침내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국제결혼 은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에게 아무래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이승만에게 초청장을 보내며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테니 꼭 혼자서만 오시라 는 전보를 두차례나 치는 등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의 열성적인 한국사랑은 곧 사람들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렸다. 그 비결은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고 한복을 입고 한국의 습속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것 이외에 딴 것이 없다. 그녀에게 한국사랑은 곧 이승만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아마도 프란체스카는 조국을 너무도 사랑하는 노신사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무한한 존경심을 느꼈던 것같다. 나이와 국경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프란체스카는 "나와 단 둘이 식사를 할 때 남편은 늘 기도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 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 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의 얘기가 되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남편 건강에 신경



그러나 아무래도 프란체스카는 외국인이었다. 이승만이 느껴야 했던 조국을 잃은 비애감, 나라를 되찾아야한다는 독립정신, 국가를 건설하며 가져야 하는 백성에 대한 사랑 등은 그로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이다. 풍습이 다른 것 정도는 별문제였다. 프란체스카는 회고록에서 "신혼시절 내 꿈은 하루 속히 한국이 독립되어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떠돌이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프란체스카로서는 그래서 이승만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을 그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로 여겼다. 자신의 회고록 제목까지 '대통령의 건강'이라고 붙일 정도였다. 실제 이승만이 90세까지 비교적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타고난 체질 탓이기도 하겠지만 프란체스카의 이같은 지극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란체스카와의 만남이 이승만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두 사람과 가까웠던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은 원래부터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자기 주관이 강한 프란체스카와의 결혼으로 한층 더 강해진 것 같다"고 밝혔다.


어쨌든 이승만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프란체스카와 결혼함으로써 안정감을 얻게 되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