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 이 관계는 이승만이 정말 친미주의자, 나아가 미국의 에이전트(앞잡이)였는가라는 문제를 해명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부분이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단연코 그렇지 않다.
미국을 우리의 모델로 삼고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오히려 이승만의 친미노선은 모두 우리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우리의 국익에 반한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과의 갈등도 불사한 사례가 수 없이 많은데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학계 일각에서는 이승만과 미군정, 혹은 하지와의 관계를 유착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유착설은 현실을 도외시한 주장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이승만에 관한 한 가장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길사간 한국사에서도 이승만이 미군정을 포함한 미국 전반을 대하던 태도를 반탁운동때 부터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던 1947년 10월까지 줄곧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운 정권을 세울 속셈이었다면 왜 당장 이승만 세우기 작업을 하지 않고 2년 씩이나 허비했겠는가. 이 점은 소련이 김일성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정권을 수립해간 과정과 명확하게 구분된다.
친미 보다 국익우선
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는 곧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이다. 1945년 10월 귀국한 때부터 반탁운동이 본격화되기 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승만에게 호의를 베풀라는 맥아더 장군의 요청도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고 좌우 세력 모두에 대해 균형적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미국무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던 하지에게 이승만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이승만과 하지의 갈등관계를 설명하는 두 축은 반탁과 미소공동위원회이다. 이승만의 확고한 반탁은 아무래도 하지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또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야할 입장에 있던 하지는 명확한 반공의 입장을 갖고 있던 이승만이 부담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를 올리버박사는 "미국 당국이 한국에 신탁통치를 펴기 위해 소련과 합의하겠다고 언약한 바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한국사람들은 이박사와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는 이상, 양측이 협력할 소지는 거의 찾을 길이 없었다"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지가 이승만에게 취한 첫번째 조치는 이승만을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사임시킨 것이다. 여러 차례의 예비회담 끝에 1946년 3월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는 한국의 신탁문제를 다룰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됐다. 그러나 이미 그전에 이승만은 표면상 건강상의 이유로, 사실은 소련과의 협상에 이승만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 하지의 압력에 의해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25일 돈암장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의원은 처음에는 신탁을 반대하다가 지금은 합작한다고 비평하는 말이 있다 하나 이것은 사실과 위반되는 말이다. 민주의원은 자초로 신탁을 반대하여 왔고 지금도 반대하는 것이다"며 하지의 압력에 굴복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1차 미소공위는 우여곡절 끝에 5월6일 결렬되고 말았다.
미소공위가 진행된 3월부터 5월 초까지 이승만은 지방유세를 떠났다. 우리는 이 점에 그동안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당초 명망을 갖춘 이승만이 독립촉성회라는 자신의 전위조직을 구성하고 다음 전국유세를 떠났다는 것은 이승만이 치밀하게 명망, 조직에 이어 대중의 지지라는 파워 3박자를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동시에 대중의 지지는 하지와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현장의 감을 발로 뛰어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된다. 이승만은 영남유세를 마치고 호남유세를 시작하려던 참에 미소공위 결렬 소식을 듣게 되고, 5월10일 서울로 올라와 11일 민주의원에서 상당히 중대한 발언을 하게 된다. "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나도 이 점에 대하여는 생각한 적은 있으나 발표는 아직 못하겠다. 지방을 순회한 소감을 말하면 희망 이상의 민족사상통일이 되어있으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힘차게 생각하였다. "
국민 반공의식 확인
그가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한 연설의 내용은 주로 반공이다. "이론상으로 공산주의는 그럴듯 하다. 만일 이 주의를 전달하는 사람들이 이 주의를 전하는 대로 실천한다면 나도 그들을 존경할 것이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에게 각각 그들의 정부를 파괴시키고 나라를 크렘린의 독재하에 넣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당신의 동생일지라도 공산주의의 훈련을 과학적으로 받았다면 이제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다. 그 동생은 소련을 자신의 조국이라 부르며 동포들을 소련에 넘겨주려 할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는 당신의 나라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이다. "
이같은 내용의 연설이 일반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것을 정치가 이승만은 파악했을 것이며 그가 말한 민족사상통일이란 다름 아닌 반공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어느 정도 확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율적 정부수립이란 곧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다.
이같은 단정구상이 명확하게 언명되는 것은 이승만이 연기했던 호남유세에 나서 정읍의 강연회에서 연설할 때였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 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
이 발언은 사실상 국내의 모든 정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스크바 협정의 준수를 고수하던 하지에게도 폭탄 이었다. 김구의 한독당과 좌익연합세력인 민전(남조선 민주민족전선)은 즉각 남북분열과 정권욕에서 나온 책동이라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김구는 단정노선에 적극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국이 좌우대립으로 진행되면서 엉거주춤한 입장에 빠지고 만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승만의 독촉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이다. 이렇게 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발족돼 이승만이 의장, 김구가 부의장으로 선출되는데 이는 이승만이 우파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정치적인 승리였다.
하지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하나로 묶는 좌우합작을 추진함으로써 다시 한번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했다.
올리버 박사가 1946년 6월2일 한국에 왔을 때 하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씨는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치지 않는 반소언동 때문에 미국이 장차 한국에서 후원 설립할 어떤 정부에도 이승만씨는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 1946년 당시 하지의 반이승만 감정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언명이다.
여기서 이승만이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면 그는 쉬운 길을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념에 따른 길을 걸었다.
미 국무부 도미 방해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동안 이승만은 고립 상태에 빠졌고 극좌파인 박헌영 진영에서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0월 대구폭동 등 잇따른 폭력투쟁을 일으켰다. 게다가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이 의장으로 있던 민주의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입법의원 구성을 시도했다.
이승만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조야를 비롯한 여론주도층에 한국의 실정을 이야기하고 지원을 얻어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가 도미 결심을 밝힌 것은 11월23일인데 그가 한국을 떠나게 되는 것은 12월4일이었다. 여기에는 하지와 미국무성의 방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동경에 있던 맥아더의 도움을 얻어 12월7일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실 미국에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무부야말로 철저한 반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