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준서 치안대 설치
1945년 8월15일 해방부터 이승만이 10월 16일 환국하기까지 2개월 동안 국내 정국은 어떤 상황이었는가. 그가 과연 어떠한 여건에서 건국운동을 시작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국에 없었던 2개월 동안의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좌익 득세기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조직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에서 건준)와 박헌영의 등장과 함께 건준을 계승 발전시킨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파성향의 조직이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한 결과라기 보다는 우파에 여운형에 비견할만한 이렇다 할 지도자가 없는데다가, 좌파의 경우 국내 정치세력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조직 운동의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발빠른 행보를 시작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8월10일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사실을 알고서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한 대비책에 골몰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측에서는 송진우, 여운형에게 차례로 치안담당을 부탁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를 거부했고, 여운형은 8월15일 아침 총독부 엔도총감을 만나 ①조선의 정치범 경제범 즉각 석방 ②경성의 식량 8, 9, 10월 3개월분 확보 ③치안유지와 건설사업 보장 ④조선학생의 훈련과 청년조직 간섭말 것 ⑤조선 노동자들의 건국사업 참여 보장 등 5개항을 제시하고 엔도총감의 마지 못한 수락을 받아낸다.
여운형은 15일 저녁부터 중도우파인 안재홍과 함께 좌우합작 성격의 건준 조직에 즉각 착수했다. 16일부터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는 수천명의 정치범들이 대거 석방되었고 이들 다수는 건준의 지방조직 사업에 적극 나서 건준의 외형적 힘은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그리고 건준은 16일 치안대를 발족시켰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앙 건국치안대 산하의 지방 치안대가 전국에 1백62개소나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여운형은 송진우를 끌어들여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할 요량으로 협조를 요청하나 송진우는 "나는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분하에 이를 거절한다. 송진우가 여운형의 협조 제의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 서중석교수(성균관대 한국사)는 그의 저서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간)에서 첫째 송진우 계열에는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민족해방운동에 관계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고, 둘째 일제 시기에 송진우 계열은 자치운동-민족개량주의의 본산으로 지목되어 사회주의자들 한테 혹독히 공격당해 감정적으로 좌파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셋째 송진우는 미국과 중경임시정부의 위력을 과신해 미군이 상륙한 후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면 다른 세력을 누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국내에서 우익을 대변할 수 있는 안재홍은 건준에 참여하고 송진우는 정세 관망의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광복 직후 정국을 좌파가 일방적으로 주도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서 교수는 앞의 저서에서 1945년 8월 정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지적하고 있다. 건준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당시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정보에 어두워 한강 남북을 기점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한다는 맥아더 미극동사령관의 발표가 나온 것은 9월2일이다. 건준에 참여했던 안재홍이 건준을 떠나게 되는 것도 미군의 서울 진주설이 기정사실화된 9월4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설득력있는 지적으로 보인다.
형식적으로는 조선총독부가 잔존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는 건준이 권력을 장악한 9월 초까지 건준에는 1백45개의 지부가 만들어졌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이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는 이때 까지이다.
박헌영 조직 급부상
오히려 9월부터는 박헌영의 부상이 두드러진다. 비록 9월7일 맥아더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는 포고령과 함께 8일 미군 7만2천명이 인천에 도착해 9일 총독부로부터 남한에 대한 통치권을 접수하고, 12일부터 아놀드 소장이 군정 장관에 취임해 미군정이 시작됐지만 미국이 한국 정세에 대해 특별한 견해를 갖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일제 말기 광주의 벽돌공장에서 숨어지내던 박헌영은 광복 직후 서울로 올라와 과거의 조선공산당 동지들을 규합해 8월20일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한다. 반면 일제하 공산주의자 정백, 이승엽, 조동호, 서중석 등은 이보다 4일 빠른 16일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서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리하여 9월8일 열성자대회가 열릴 때까지 조선공산당 내에도 재건파와 장안파가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대회를 고비로 박헌영이 공산당내 주도권을 장악했다. 박헌영은 이처럼 공산당 세력내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는 한편 건준에도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8월말과 9월초 미군의 서울 진주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안재홍을 비롯한 건준내 우파들이 탈퇴하자 건준에 대한 박헌영파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높아지고 그것은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 소위 인공의 선포로 이어졌다.
9월6일 테러를 당한 여운형이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박헌영 세력의 주도로 열린 인민대표대회에서 일방적으로 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이 선출됐다. 인민위원에는 이승만, 김구, 안재홍, 조만식, 김성수, 이용설, 김병로, 신익희 등 우파인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14일에는 중앙위원회에서 사실상 내각이라 할 수 있는 정부부서 명단이 발표되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정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군사부장 김원봉, 재정부장 조만식,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체신부장 신익희.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같은 명단을 작성한 사람은 박헌영인 것같다. 이 명단은 사실 본인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므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아무리 형식적이고 정치적 제스처 차원에서이긴 하지만 주석 이승만이란 대목에 대해서는 분석을 요한다.
현대사 연구가 김남식씨는 남로당연구(돌베개간)에서 "(박헌영이) 이승만을 주석에 앉힌 것은 미군정을 의식한 것임과 동시에 중경 임시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움으로써 미군정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거부감을 무마시키고, 동시에 정통성 면에서 아무래도 인공에 비해 우위에 설 수 밖에 없는 임시정부를 교란시키기 위한 전술이었다는 것이다. 김씨의 분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 이유를 제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편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주석 이승만이란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애당초 이승만이란 인물을 부정한 상태에서 접근한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이승만을 인공 주석으로 추대했다는 사실을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조금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서중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정치적 후광이 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상의 세가지 견해들은 모두 현재의 입장에 치중한 나머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당시에 지녔던 한국 정치권에서의 상징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만일 박헌영이 대중성이나 자질면에서 이승만보다 뛰어나거나 최소한 버금갔다고 했을 때도 그런 조각 을 했을 것인지 부터 물어보아야 한다.
정치적 상징성 이용
박헌영은 이승만이란 이름 석자가 당시에 갖고 있던 상징적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용 목적이 단순히 미군정을 의식했거나 임시정부를 견제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이승만을 최고위직에 앉히지 않고서는 국민들에 의해 대표성 을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정확한 분석이 아닐까. 이는 특히 인공의 각료명단이 현실적인 정치 협상의 결과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박헌영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최대한 이상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아마도 당시 정국에서 동원가능한 인물들을 총망라해 본인들의 정치적 입장은 별개로 하고 이상적인 조각을 한다고 했을 때, 바로 인공의 각료명단과 유사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승만이 가공의 정부에서 정치적 후광을 얻었다는 것도 앞뒤가 뒤바뀐 견해라 할 수 있다. 인공이 이승만이 가진 정치적 상징성을 이용하려 한 것이지, 이승만이 인공의 주석이 됨으로 해서 정치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미국무부의 방해로 귀국이 지연되고 있던 2개월 동안 국내에서는 본인의 의사와 하등 관계없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