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10일 미-소 공위에 참가하지 않은 이승만, 김구 두 지도자는 한국민족대표자회의를 구성키로 하고 12일 덕수궁에서 이처럼 굳은 악수를 했지만 한달도 되지 못해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김구, 미군정 무시
1947년 4월 이승만이 성공적인 도미외교를 하고 돌아왔지만 그것이 곧바로 국내에서 입지강화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미국은 여전히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고 있었고, 하지의 태도 또한 여전히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신탁통치문제와 건국의 관계를 둘러싸고 당시 정치지도자들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싸움 공간에서도 이승만은 나름의 입지를 마련해야했다. 그 무렵 각 정파별로 신탁과 건국의 관계를 보는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은 장차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전제로 일정기간 신탁통치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미소라는 힘의 존재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이 노선은 분명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남북간의 좌우합작이 아닌 남한 내부의 좌우합작이 과연 통일국가건설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의 문제와 함께 민족의 자주성을 크게 훼손하는 문제점이 있다.
김구는 두 차례의 정권인수 시도가 보여주듯 반탁=건국으로 직결시키려 한 입장으로 민족주의라는 원론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미군정이라는 현실적 힘을 부정한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이어지는 한계를 노출시켰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임시과도정부를 세우고 장기적으로 통일정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 입장은 당시 이승만이 내세운 것처럼 자율적 정부수립이라 해서 민족의 자존심도 지키고 현실성도 갖춘 길이기는 하지만 목전에 닥친 분단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한 채 오히려 그것에 편승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남한 만의 정부수립을 위한 작업에 적극 나선다. 그의 구상은 우선 미군정과 합작해 보통선거법을 제정, 총선거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를 유엔에 참가시켜 남북통일을 촉진시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1947년 5월21일 부터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였다. 제1차 때와는 달리 제2차 미소공위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돼 6월25일 서울에서 남조선 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합동회의를 갖는데 성공했고, 6월30일부터 7월3일까지는 평양에서 본회의를 개최하고 북조선 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합동회의도 가졌다.
미소공위를 보는 이승만의 시각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우선 그는 공산주의와의 협상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동시에 미소공위가 성공할 경우 그로서는 치명적이라는 정치적 동기도 배경에 깔려 있었다.
우익의 여타 정파들이 앞다퉈 미소공위에 참여코자 할 때에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공위 참가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승만이 6월2일 성명을 통해 밝힌 입장을 보면 이미 그는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사람들이 쿠바나 비율빈(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다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비율빈 사람이 아니고 4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사람이다. 나는 미소공위에서 우리 의견에 맞지 않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보다는 총선거를 통하여 자율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총과 폭탄이 나의 육체는 꺾을 수 있겠으나 나의 정신과 주장은 꺾지 못할 것이다.
헌병이 24시간 감시
그가 이처럼 격한 성명을 발표한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다. 하지는 미소공위가 재개되는 시점에 맞춰 5월부터 7월까지 이승만의 외부 활동을 중단시켰다. 올리버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박사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그와 같은 상태는 봄과 여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의 전화는 철거되었다. 헌병이 배치되어 24시간 근무로 그를 지켰다. 모든 그의 발수신 우편물은 엄격히 검열되었다 . 그의 주간 라디오 담화와 한국민에 접근하는 모든 수단이 일시 중단되었다. "
실제로 이승만은 이 기간동안 단편적인 성명 두 세 건 정도를 발표한 것 외에는 별다른 대외활동을 벌인 기록이 없다. 그래서 올리버는 편지를 통해 이승만에게 "가능한 한 군정에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까지 했다.
그러나 미소공위 불참이라는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에 모든 반탁진영이 참가한 것은 아니다. 이승만의 측근 조직인 민족통일총본부와 전국학생총연맹, 김구의 한독당 일부 등이 이승만을 지지해 6월23일 서울 데모를 시발로 해서 전국각지에서 반탁 및 이승만, 김구 지지 시위를 벌였다. 오히려 한민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우익단체들은 공위에 참가했다.
해방 정국에서 한민당의 움직임은 언제나 권력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는 점에서 당시 권력 소재를 파악하는 바로미터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승만 노선이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한민당은 송진우 암살 이후 밀착했던 이승만과 다시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그 전에 "참가 불참가는 각 단체가 개인의 자유 의사로 결정할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회의에 참가하여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을 해석하기 곤란하다. 설령 자타를 속이고 공위에 참가하더라도 반대할 기회를 허락지 않을 것이다"며 사실상 우익 진영의 불참가를 촉구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민당이 공위 참가를 결정하자, "왜놈들 같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야"라고 측근들에게 섭섭한 감정을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공위는 평행선을 긋는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8월20일 제54차 본회의에 소련측 대표가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3개월만에 사실상 결렬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2년 가까이 끌었던 해방정국의 정치싸움에서 이승만은 사실상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몇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선 7월19일 좌파의 지도자 여운형이 혜화동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백주대로에서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배후는 밝혀지지 않고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기는 미군정이 남한 단독정부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공위 추진과는 별도로 단계 단계 정지작업을 펼친 시기이기도 했다. 5월14일 군정청의 한국인 기관을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하고 행정권을 대폭 이양했으며, 6월27일에는 입법의원을 통해 보통선거법안을 통과시켰다. 결과적으로는 이승만이 예전부터 주창한 절차를 밟는 것이었다.
하지로서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될 경우 이승만의 정치공세가 거세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친미성향 이승만에 대적할 만한 명망 등을 가진 새로운 대체인물이 있어야 했다. 하지가 볼 때 이승만은 비록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긴 하지만 독자적 리더십을 내세우는 것이 아무래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인물이 서재필이었다.
2백여명 투표 선출
우선 구한말 독립운동가에다 한때 이승만의 정신적 스승이었으며, 일제하에서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을 만큼 친미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하지로서는 생각해 볼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서재필은 83세의 고령이었던데다가 국내에 정치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하지의 무리수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하여튼 서재필은 7월1일 특별의정관이란 직함으로 한국에 온다. 처음에는 아무런 욕심도 없다고 발표했던 그는 하지의 의중을 알고서는 기회가 허락한다면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며 정치에 나설 뜻이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지가 서재필을 초청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재필 아니라 서재필 할애비를 불러와 봐라, 되나"라며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결국 서재필은 이승만을 비롯한 국내 정치세력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인 48년 쓸쓸하게 미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한편 이승만은 우익 내에서 공위에 참여치 않은 세력만이라도 한데 묶을 필요성을 느껴 7월10일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연다. 김구세력을 끌어들여 공위와 미군정에 대한 압력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한편, 자신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대표의 선발방식이었다. 독촉국민회 조직이 중심이 돼 총선거법에 준한 투표방식에 따라 민족 대표 2백여명을 선출한 것이다. 이는 정부수립에 앞서 예비훈련을 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율정부 수립론과 김구의 임정 봉대론은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결렬되고, 9월이 되면서 이승만은 결국 공위 실패로 다시 이승만 노선으로 돌아선 한민당 세력과 손을 잡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국내 정치세력의 판도는 우파, 좌우합작파, 좌파로 3분돼 있던 형세에서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이승만-한민당 세력과 단정에 반대하는 남북협상파-김구-김규식 세력으로 재편된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