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2월7일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워싱턴의 칼튼호텔에 여장을 풀고 측근인사들을 불러모았다. 스태거스 변호사, 제롬 윌리엄스 기자, 굿펠로 미군정 정치고문, 올리버 박사, 임영신, 림병직 등. 이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이 미국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그를 도왔던 사람들이다.



유엔의장 면담 실패



이승만은 이들과의 협의를 거쳐 미국무부에 전달할 건의서를 작성했고 "조선인의 독립요망은 즉시 청취되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조선인의 인내는 최후 단계에 달하고 있으며 조선인의 정당한 요구는 즉시 용허되어야 할 것이다. 즉 자유롭고도 민주주의적인 조선의 탄생이야말로 극동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전세계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신전쟁이 야기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다른 한편 트루먼 대통령 및 폴 헨리 스파크 유엔총회 의장과의 면담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무부의 반이승만 기류는 여전했으며 스파크와의 면담도 미국무부로 추정되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좌절됐다. 이승만은 접촉 방향을 의회와 언론으로 돌렸다. 이는 독립운동 당시에도 그가 활용했던 익숙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윌리엄 놀랜드, 로버트 태프트, 아서 반덴버그, 존 스파크먼 의원 등이 이승만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언론에서는 제롬 윌리엄스를 비롯,  AP통신의 존 하이타워, 시그리드 안, UP통신의 스튜어트 헨슬리, 뉴스위크의 해롤드 아이작 기자 등이 그를 지지하는 기사를 써주었다.


이승만의 입장은 초지일관이었다. 미국은 더 이상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하는 정책을 계속해서는 안되며 한국의 조속한 독립만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하지와 미군정의 대한정책이 용공적이며 실정을 거듭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미국무부에 대해서도 "미국무부 내의 일부 분자는 조선에 독립을 수여한다는 미국의 언약 실천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공격했다.


당시 미국무부 내에는 존 힐드링 국무차관보처럼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인물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한국에 관해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견해는 나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극동국장 빈센트는 반이승만이었으며 소련과의 협상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원래부터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미국무부는 1946년10월 아놀드 군정장관의 '김구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었고 이승만은 강력하나 완전히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는 보고 나 12월 하지의 '이승만은 모든 것을 그 자신의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처리되기를 바라고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이를 이끌기를 원하는 골칫덩어리'라는 보고를 받고 이승만에 대해 더욱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미 군정, 우익 배재



그러나 세계정세가 바뀌고 있었다. 이 무렵 트루먼 미대통령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해 우려하며 루스벨트 이래 계속돼 온 대소 온건론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대소 유화론자 번즈 국무장관의 교체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이승만이 몰랐을 리 없다. 올리버는 "워싱턴에서 이 박사는 서울에서 보다는 눈에 띄게 (자신에 대해 혹은 자신이 구상하는 방향에 대해) 훨씬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음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하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들이 상당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국내의 사정은 어떠했던가. 하지는 1947년 1월11일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강력히 시사하는 미-소간의 서한내용을 공개했다. 특히 소련의 서한에는 '공동위원회와 협의하기 위해 초청받은 각 정당 및 사회단체는 적극적으로 모스크바 결정의 반대를 주장하는 데 동의한 대표자들을 임명하지 말 것'이라는 주장이 들어있었고, 미-소공위 재개의 시사는 미국측이 이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곧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이날 하지는 이와 관련해 "반탁투쟁을 한 정당-단체에게 모스크바 결의를 지지 서명케 하여 이들 정당 단체가 공위와의 협의 참가가 허용된 후에는 모스크바 결의에 반대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한동안 잠잠했던 반탁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미국의 이승만과 국내의 김구가 주도했다. 그런데 김구는 3월초 다시 한번 반탁운동을 정부접수 기도 로 연결시키려다 미군정에 발각돼 실패를 겪게 된다. 이승만과의 경쟁의식에서 나온 무리수였다. 이로써 현실정치에서 김구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만다. 여기에는 한독당의 내분, 한민당과의 통합 실패 등도 크게 작용했다.


이런 차에 3월12일 트루먼대통령은 상하원에서 의회가 지중해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에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그리스, 터키 양국에 4억달러의 차관을 부여할 것과 미국이 군사고문을 양국에 파견할 것을 승인해주기를 바란다고 연설했다.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은 한국문제에 관한 한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일관되게 주장해오던 반공-반소노선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은 "그리스, 터키에 대한 원조안이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선례가 될 것"이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 독트린이 즉각 한국정치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미-소공위는 계속 추진돼 마셜 미국무장관과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 사이에 교섭이 진행됐고 5월21일에는 서울 덕수궁에서 2차 공위가 열린 정도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승만의 정치적 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10년대말 임정 초대대통령 추대와 40년대 초 일본내막기 발간에 이어진 태평양전쟁의 발발이다. 1910년대에는 하와이 교민단체의 내분이 극에 달해 이승만도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열기마저 식어 할 일이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1919년 3월1일 국내에서 3.1운동이 터졌고 그후 국내-외 각지에서 생겨난 임시정부들에서 총리나 수반급 지도자로 추대돼 교민사회에서 잃어가던 명망을 되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운의 작용도 크게 있었다고 보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곤란한 대목이다.


1930년대에도 독립운동의 열기가 가라앉고 이승만의 외교노선도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사조직인 하와이 동지회에서 마저 그를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간 적이 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회고록 비슷한 독립운동사의 집필이었고, 이를 위해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가 상황이 바뀐 것을 보고 영어로 쓴 책이 일본내막기이다. 이 책으로 인해 그의 성가는 다시금 올라갔고, 그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정치생명은 지속차원을 넘어 더욱 강화됐던 것이다.



예견 능력은 과장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 시기가 이승만의 체미 중에 이루어진 것도 이승만의 운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그 전제 조건으로 이승만이 자신의 일관된 노선을 견지했다는 것이 지적돼야 한다. 그러나 이를 무조건 이승만의 예견 능력으로 파악하는 일부 학자들의 시각은 지나치게 그를 미화한다는 혐의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직접 거둔 성과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4개월 도미는 우연의 일치로 인해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성과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1년전 공표했던 단정노선에 그보다 더 힘을 실어주는 것은 없었다. 사실 이승만은 김구가 제2의 쿠데타 를 추진한 3월 초부터 귀국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무부측의 방해로 한달 이상 귀국이 지연됐고, 결과적으로는 미국에 있을 때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 됨으로써 외견상 마치 이승만의 작용이 미쳐 그런 독트린이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됐다.


천신만고 끝에 귀국허가를 받아낸 이승만은 4월5일 미니애폴리스를 출발해 도쿄에 들러 맥아더를 만나고 다시 상해를 거쳐 남경에 들러 장개석과 회담한 다음 장개석이 제공한 특별군용기 자강호를 타고 4월21일 김포에 도착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던 이승만은 귀국 직후 특유의 과장과 선동성을 섞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에 민주정체 건설을 절대 지지하며, 국무부 당국 모씨는 한국에 총선거로 독립정부를 수립함에 찬성이고, 중국은 장주석 이하 정부당국과 민중여론이 다 동일히 만강 열정을 표하며, 맥아더장군은 나와의 2시간동안 담화에 한인들이 자치-자주할 능력이 있는 것과 권리 사용의 필요는 누구나 인정치 않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


1946년 12월초 궁지에 몰려 떠날 때와는 전혀 달라진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