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1948년 7월17일 공포되고 3일후인 7월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의 당선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승만은 1백80표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밖에 김구 13표, 안재홍 2표였으며 무효 1표였는데 그 한 표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서재필을 찍은 것이었다.


오히려 각 정파의 관심사는 부통령과 국무총리였다. 이 때 부통령은 선출직이었고 국무총리는 임명직이었다. 한민당에서는 부통령 이시영, 총리 김성수를 밀었고, 독촉계에서는 부통령 이시영, 총리 신익희를 생각했으며, 무소속 구락부는 부통령 김구, 총리 조소앙을 구상했다.


부통령 선출과 관련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이화장에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그의 의향을 확인하려고 했다. 한민당에서도 김성수, 홍성하, 백남훈 3인이 이미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에 이승만을 방문해 대통령이야 당연히 이승만이지만 부통령은 말이 많으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승만의 뜻을 타진했다.



부통령 선택에 고심



이 때 이승만은 임정과 북한의 대표성이라는 차원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같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을 찾아온 한민당 인사들에게 부통령감으로 처음에는 임정을 대표하는 이시영이 좋겠다고 말했다가 얼마후 조만식이 더 좋겠다고 말하는 등 방향을 확정하지 못하고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남한단독정부론을 추진하고 끝까지 관철시킨 이승만으로서는 정치적 업보와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북한이 분리돼 나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당성 확보도 중요하지만 그 와중에서 떨어져 나간 김구로 대표되는 임정의 정통성 계승 문제 또한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이시영을 택한다. 이시영은 환국 후 줄곧 김구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다가 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해 한독당을 떠나 이승만을 선택한 노애국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이시영은 정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김구를 찾아가 "나는 이미 늙었으니 이박사가 대통령이 되고, 김구가 부통령이 되고, 조소앙이 국무총리가 되어 남북통일을 이룩하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시영은 다시 이승만을 찾아가 같은 구상을 내놓고 이승만이 직접 나서주기를 요청했다. 이승만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런 반응은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부통령 선거 직전에 행한 기자간담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자들이 "부통령에 김구가 나오게 되면 합작할 의사가 있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김구, 60여표 획득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김구의 태도는 아직 동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는 의사가 맞는 사람이 일치단결하는데서 공고히 되는 것이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의사가 맞지 않으면 정부는 자연적으로 흔들려지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서는 김구가 불원간에 태도표명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구는 정부가 수립되더라도 미국 사람이 우리 정부에 간섭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 정부수립에 있어서는 미국은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있다. 사실 미국사람이 우리 정부에 간섭한다면 나 자신도 그것을 반대한다. "


단호한 부정의사를 담은 내용이다. 이런 가운데 20일 오후 실시된 투표에서 1차에는 이시영 1백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 등으로 재적 3분의 2를 얻은 후보가 하나도 없어 2차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이시영 1백3표, 김구 62표 등으로 이시영의 당선이 확정됐다. 김구가 총선거에 불참하고 남북협상이 실패해 정치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번 다 60여표를 얻었다는 것은 김구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1948년 7월24일 74세의 노정치인 이승만은 드디어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 취임식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오른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의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는 일편 감격한 마음과 일편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며 소감을 피력한 후 장차 내각구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간에 여러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 언론에 불과하며 며칠 안으로 결정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니, 부언랑설(부언낭설)을 많이 주의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하게 주의할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이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될 것이다. 큰 사람은 능히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작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아니라 작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


감격적인 분위기에서 이승만의 이같은 발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의례적 표현이 아니었음은 개각 발표 내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각 내용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무총리의 선임이 큰 관심사였다. 사실 정계는 말할 것도 없고 시중에서도 한민당의 김성수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았다. 그것은 당시 이승만과 한민당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밖에 신익희 국회부의장과 원외인사였던 조소앙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여론상 추측은 이 세 사람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7월27일 이승만은 초대 국무총리를 지명하기 위해 국회에 출석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이 사람의 생각에 국무총리보담 덜 중요하지 않은 책임을 김성수에게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발표될 때 보면 알려니와 이러한 각오 하에서 김성수는 그 자리를 피한 것이다 신익희는 누구나 그분보다 더 낫게 생각할 국무총리 자격이 몇분 안될 것이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수십년 전부터 깊이 알고 친임하며 애중히 여겨오는 터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 3권분립에 국회가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조소앙은 불행히 근자에 와서 총선거 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우리 대업에 다소간 방해가 있었고 민심이 따라서 현혹하게 된 것을 우리가 다 불행히 여기는 바이다. "


김성수는 이승만 자신이 국무총리라는 허세보다는 앞으로 미국의 경제원조 문제를 전담하게 될 재무장관을 맡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을 얼굴 마담 정도로 생각하고 사실상 내각책임제의 정부라고 생각했던 한민당 쪽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총리를 비롯해 요직 장관 대여섯명을 확보함으로써 사실상 내각책임제에 준하는 권력을 장악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승만은 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끝낸 후 "국회의원 중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의원들의 반응은 경악, 의외 등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 이승만은 이윤영을 선임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 공포에 대해 이윤영 의원이 가장 놀랄 줄 안다. 이 분을 임명하는 나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 첫번째 총리 임명에 먼저는 국회의원 중으로서 택할 것을 많이 생각한 것이니 민의를 존중히 하고자 하는 본의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로 이북 대표 한 분이 그 자리를 점령하기를 특별히 관심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급급한 우리 문제 중에 제일 급한 것은 남북통일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정책을 쓰든지 이북 동포의 합심협력을 얻지 않고는 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먹으나 굶으나 머리둘 집간이라도 있고 이만치라도 자유활동하고 살아온 터이나 이북동포의 냉혹긍측한 정형은 우리가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 없는 터이다. "



이범석 총리안 관철



이승만으로서는 임정을 대표하는 이시영이 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북한의 대표성을 보완할 수 있는 인물을 고른다는 차원에서 이윤영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이 목사를 편애해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한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이윤영 이란 인물의 지명도가 낮았기 때문에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결국 인준표결에서 이윤영은 찬성 59표, 반대 1백32표로 부결되고 만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정계에서는 영향력이 별로 없었지만 국민에게는 신망을 얻고 있던 민족청년단의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으나 이승만은 이화장으로 국회의 주요인사들을 불러 개별적 설득작업을 하는 한편, 정부수립의 시급성을 내세워 이범석 총리 안을 관철시킨다. 이제 정부수립을 위해 남은 것은 각부 장관의 선임이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