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영 총리 선임의 국회부결로 파동을 겪은 후 다시 지명한 이범석총리가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찬성 1백10표, 반대84표, 무효3표로 인준된 것은 1948년 8월2일이었다. 이어 이날 저녁 법무 이인(무소속), 재무 김도연(한민당), 농림 조봉암(무소속), 교통 민희식(무소속) 등 네 명의 장관 명단이 비공식으로 흘러나왔다.



원내인사 8명 입각



그리고 3일 오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위의 네명을 비롯해 내무 윤치영(촉성국민회), 외무 장택상(무소속), 상공 임영신(여자국민당수), 문교 안호상(무소속), 사회 전진한(촉성국민회), 체신 윤석구(무소속) 등의 명단이 발표됐고 국방은 이범석이 겸임케 됐다. 장관 12명중 원내인사는 8명, 원외인사는 4명이었다. 이 중에서 한민당 인사는 원래 이승만이 김성수에게 주려했던 재무장관에 임명된 김도연 한 명뿐이었다. 사실상 한민당을 배제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초대내각 조각작업은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활발하게 진행됐다. 조각본부였던 이화장에는 주요 정계인사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이승만은 비밀리에 각각 김성수, 조병옥, 장택상, 윤치영, 서상일, 허정, 이인 등 한민당인사와 자신의 노선을 지지했던 인사들에게 추천명단을 내도록했다. 그러는 한편 나름대로 조각명단을 구상해 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성수는 자신의 총리 임명을 전제로 한민당 사람 6명의 각료명단을 이승만에게 제출했으나 김성수는 총리 임명에서 배제됐고 한민당 인사는 결국 1명 만이 지명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한민당에서 다수가 입각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여러가지 분석을 요하는 대목이다.


물론 그 일차적 이유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 세력인 한민당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민당이야말로 내각제 구상을 통해 이승만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장본인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차원의 분석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승만은 환국 이후 김구의 임정세력과 멀어지고 한민당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듣게 된 "돈과 친일파만을 좋아한다"는 비판을 부담스러워 했다. 실제로 한민당은 전통적인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다수의 친일파들이 은신처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한민당과의 유착은 정치투쟁 과정에서 특별한 자금이나 조직이 없던 이승만에게 상당한 힘을 실어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단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승만에게 한민당과의 결별은 친일세력과의 거리두기라는 의미도 일부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민당 자체의 한계도 있었다. 먼저 5.10선거의 당선자 현황을 보자. 무소속 8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 한국민주당 29, 대동청년단 12, 조선민족청년단 6, 대한노동총연맹 1,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 기타 10 등이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한민당은 29석으로 12.7% 밖에 안된다. 그러나 무소속이나 다른 단체에도 한민당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당시 한민당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그렇게 우호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의 간판을 달고 당선된 인사들이 많았다. 학계의 분석에 따르면 대략 60여명 정도를 한민당 인사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자금과 조직력 면에서 한민당은 분명 당시의 어느 조직이나 단체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지주세력과 일부 친일파의 결합체라는 부정적인 대국민인식이 한계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내각 명단중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은 농림의 조봉암이다. 원래 이승만은 조봉암을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해방 후 조봉암이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더욱 좋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제헌국회의 한 회의때 조봉암의 발언을 듣고 좋은 인상을 받아 눈여겨 두었다가 자신이 직접 조봉암을 장관으로 천거했다.



농지 개혁에 진보적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승만이 순간적 기분으로 조봉암을 초대 농림장관에 앉힌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수립과 함께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농지개혁이었고 한민당의 경우 농지개혁을 반대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오히려 급진적 인사를 농지개혁을 담당할 농림장관으로 앉힌 이승만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는 미국체제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간주했고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보수적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진보적 혹은 덜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점은 그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여러차례 언급을 통해 밝힌 바 있고, 해방 후에도 반복해서 밝혔다. 실제로 이 점은 농지개혁 과정에서 이승만이 한민당의 지주중심 농지개혁 방안을 좌절시킨데서 드러나게 된다. 조봉암을 통해 자신의 지나친 보수우익 이미지를 완화시킬 의도를 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분석이 될 것이다.


다음은 내무 윤치영, 외무 장택상이라는 정반대의 인선이다. 물론 그것은 경력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미군정에서 경무국장을 지낸 조병옥이나 수도청장을 지낸 장택상이 내무를 맡고, 미국에서 이승만의 독립외교를 도운 적이 있는 윤치영이 외무를 맡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서로 사이가 나빴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내무장관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내무는 아무래도 측근 인사가 낫겠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윤치영에게 내무를 맡기고 외무를 장택상에게 맡겼다. 조병옥은 일단 대통령 특사로 정부승인 외교를 담당토록 했다. 조병옥은 한민당 사람이었기 때문에 견제의 의미까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관인 임영신의 상공장관 임명이다. 원래 상공장관에는 허정이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환국해 프란체스카가 한국에 올 때까지 가까이에서 보필했을 만큼 이승만을 따랐던 임영신은 정부수립 이전에 이승만을 도와 임병직과 함께 대미교섭을 했었다. 그러다가 정부수립과 함께 급거 귀국해 바로 이화장을 찾아가 각료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항의를 하니까 이승만은 허정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임영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데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각료인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비난이 일자 이승만은 특유의 현실적 입장을 견지하며 "언제는 일본의 학정이 만족스러웠고 미군정이 만족스러워서 살았는가. 이제 나라를 세우고 막 시작하는데 단합하지 않고 시비부터 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좌익-김구세력 불참



그리고 친일경력의 소유자가 일부 각료 중에 포함된 것과 관련해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초대내각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반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민당이었다. 결국 한민당은 8월8일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비 주의로서 임할 것이며 정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야당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이같은 초대 내각구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거국내각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좌익세력은 무장노선으로 사실상 정치권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김구세력이 명백하게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반의 거국내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8월15일 중앙청 광장에서 맥아더와 하지가 귀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갖게 된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지 38년만에, 해방된 지 3년만에 대한민국 건국이 세계 만방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