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결과를 보면 총 2백10명중 무소속 1백26, 민국당 24, 대한국민당 24, 국민회 14, 대한청년단 10, 대한노동총연맹 3, 일민구락부 3, 사회당 2, 민족자주연맹 1, 대한부인회 1, 중앙불교위원회 1석 등이다.
5.10 선거에서 총 1백98명중 무소속이 85명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우선 5.30 선거는 무소속의 대거 약진이 가장 두드러진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제헌국회 후반기 때 각각 70여석씩 차지하며 의회정치를 주도했던 여당 격인 대한국민당과 민국당이 나란히 24석을 차지하는 참패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5.30 선거에서는 5.10 선거를 보이콧했던 중간파와 진보계열이 참가해 조소앙, 원세훈, 안재홍, 장건상, 여운홍 등이 당선됐다.
진보계열 원내로
주로 1980년대에 이루어진 정치학계의 분석은 대략 이랬다. 단정세력을 대표하던 이승만과 민국당이 참패함으로써 무소속이 대거 늘어났다는 것은 이승만 정권의 위기라는 해석이다. 현대사에 대한 좌파적 해석을 대표하는 강정구 교수(동국대 사회학)는 5.30 선거는 한마디로 극우 분단세력의 참패와 중도 진보세력의 현격한 진출로 특징지워지며, 그 이유는 중도 진보세력이 무소속으로 대거 진출했다는 점과 이승만 정부가 효과적으로 관권선거를 수행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는 입장이다. 이런 견해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일부 좌파 학자들에 의해 제기돼 학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5.10선거와 5.30선거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두고 학계에서는 새로운 해석들이 대두하고 있다. 강정구 교수는 1993년 한국과 국제정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간) 제9권에 기고한 논문 5.10선거와 5.30선거의 비교연구라는 논문에서 5.10선거는 극우 분단세력의 압도적 승리인 반면 5.30 선거는 극우 분단세력의 참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4년 한국과 국제정치 제10권에 기고한 논문 강정구의 5.10 선거와 5.30 선거의 비교연구에 대한 반론에서 전상인 교수(한림대 사회학)는 5.10 선거는 미군정의 비호 속에서도 단정세력이 의석의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패배 내지 상처뿐인 영광에 불과하며, 5.30 선거는 5.10 선거의 확대 재생산으로 봐야한다고 반박했다.
강교수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좌파적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체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강한 분석이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5.30 선거로 최대 위기를 맞았는데 다행히 전쟁이 나는 바람에 되살아날 수 있었다는 논리를 펴기 위한 전제마련의 성격이 짙다.
예를들어 그는 5.10 선거의 무소속 당선자들은 대부분 극우성향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승만 편이었다고 하면서, 5.30 선거에서는 무소속이 늘었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반면 전상인 교수는 5.10 선거에서 무소속 당선자 중 상당수가 당명을 어기고 출마해 당선된 진보적 중도세력이며, 이들이 그후 국회에서 소장파로 활동하며 중도 내지 진보성향을 보였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이승만 진영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중시하면서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분석한다. 훨씬 현실에 부합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과는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도 있다. 정치학 분야에서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이승만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썼던 김일영 교수(성균관대 정치학)는 양대 선거의 당선자들에 대한 치밀한 정치성향 분석에서 우선 다른 학자들과 구별된다.
5.10 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무소속 85명, 한민당 29명이었다. 그런데 김교수는 1948년 6월13일 결성된 무소속구락부에 참가한 사람이 53명 뿐이었고 그후 국회의장단 선거나 여러차례의 법안통과 과정에서 한민당이 일정하게 70석 안팎을 유지하는 것을 볼 때 최소한 무소속에는 위장된 한민당 세력 30여명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7월20일에 열린 정부통령 선거에서 김구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통령 후보로 추대돼 1, 2차 모두 60여표를 얻은 점을 들어 결국 무소속을 극우로 보는 강교수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한다. 김교수는 30여명 정도는 위장된 한민당 세력이고 50여명 정도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세력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단정세력이었던 한민당이 65~70석, 독촉 55~60석, 무소속 50석으로 파악해 1백30대 50으로 단정세력이 승리했다고 결론짓는다.
따르는 정당 많아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김교수는 5.30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에서도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먼저 그는 이승만 세력을 대한국민당과 동일시해 24석으로 계산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강교수의 이승만 위기론을 정면 반박한다. 대한국민당이 1950년 3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부결시키는 과정에서 이승만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승만 자신은 여전히 특정정당의 지도자보다는 초당적 지도자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발간된 한국과 국제정치 제11권에서 "그(이승만)는 대한국민당만을 자신의 정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따르고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는 모두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 이승만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를 떠받드는 정당-사회단체는 많았는데 5.30 선거에서 의석을 차지한 정당-사회단체들 중 그 범주에 드는 것들로는 대한국민당 외에도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일민구락부, 대한부인회, 중앙불교위원회, 여자국민당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이 차지한 의석수는 24석이 아니라 이들 정당-사회단체들이 얻은 의석을 모두 합한 57석으로 보아야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김교수는 "이 점은 선거사 국회사 등 거의 모든 정부간행 문건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기존연구는 그 점을 도외시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당시 이승만을 비롯한 극우 분단세력 전체가 위기에 빠졌음을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좌파적 견해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은 이승만 자신의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선거가 끝나고 한참 후인 10월11일자로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5.30 선거와 관련된 언급이 나온다.
"지난 5.30 선거에서 내가 졌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오. 그러나 그것을 그럴싸하게 들리도록 한 어떤 정치적 관련은 있었소. 2명의 국회부의장 중의 한 사람인 전 내무장관 윤치영씨가 일민주의에 입각하여 대한국민당이라고 하는 소규모의 정당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온 국민이 신봉할 민주주의 지도이념으로서 내가 보급시킨 것이오. 이 주의는 이름 그대로 (양반과 상놈, 빈부, 남녀, 남북출신 등을 가릴 것없이 평등하다는) 하나의 규범이나 국민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오. 이 원리에 대한 나의 선언이 있은 이후 많은 정치인들이 이것을 기초로 하여 정당을 조직하려고 하였소. 나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정당의 구상을 찬성하는 모든 인사들이 원리 그 자체보다는 정치에 더욱 관심이 크고 나아가서는 정당 조직이 국민의 국가적 단결을 위태롭게 할까 두려운 고로 나는 이러한 운동을 지지하기를 거부하였소. 이러한 생각을 모두 숨김없이 여러차례 발표하였으며 일반국민은 나의 소견을 묵묵히 따라주었소.
그러나 미스터윤은 조용히 자기의 조직사업을 계속하여 시골의 지지세력은 말고 50명에서 60명에 이르는 국회의원들을 엮어놓았소. 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미스터 윤은 낙선되었고 그로부터 대통령 정당의 당수인 윤치영이 패배하였으니까 대통령도 패배하였다는 인상을 낳게 하였소. 사실에 있어서 국민들은 내가 윤씨나 그의 정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
민국당이 큰 타격
김일영 교수는 "5.30 선거의 승패를 제대로 따지기 위해서는 이승만 세력과 민국당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전제하고 "이승만은 현상유지를 한 반면 민국당은 핵심인사인 조병옥, 김준연, 백남훈, 김동원, 서상일, 백관수 등이 낙선하는 등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패배해 위기에 빠졌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튼 6 25를 불과 일주일 앞둔 6월19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장단 선거에서는 신익희가 2차투표에서 의장으로 당선됐고 부의장 선거에서는 3차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장택상과 조봉암이 선출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승만이 의장후보로 민 중도계열의 오하영은 이승만 지지세력이 60여석에 가까웠는데도 불구하고 40여표 밖에 얻지 못했고 오히려 민국당을 대표하는 신익희가 1백9표나 되는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는 점이다. 보다 많은 분석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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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