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가 기질 발휘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어떠한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6 25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백선엽이 89년 펴낸 전쟁회고록 "군과 나 (대륙연구소간)"에서 한 말이다.
물론 이 말은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전략가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전략가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기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전생애를 통틀어 보더라도 6 25전쟁 3년 동안일 것이다. 특히 9 28서울수복 이후 그가 보여준 몇가지 결단은 전략가 이승만의 성가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9월28일 한국군에 비밀리에 내린 38선 돌파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에 넘기기로 한 7월12일의 대전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북진론을 주장해온 맥아더라는 존재가 크게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6 25 대응전략을 간략하게 조감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 고위층에서는 한국전쟁을 보는 관점이 크게 세가지로 갈리고 있었다. (소차목정부 지음 한국전쟁 청계연구소간)
우선 국무부 내에 두개의 관점이 대립했다. 존 앨리슨 동북아과장-딘 러스크 극동담당 국무차관보-존 댈러스 국무장관고문 등으로 이어지는 국제주의적 관점 이다. 이들의 기본입장은 38선을 넘어 북한 전역까지 밀어붙여 통일한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소련의 야욕을 국제연합에 의해 견제해야 한다는 논리 위에 서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한국문제를 UN에 넘겨 처리한 것도 사실상 이들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찰스 볼렌 주불공사, 조지 케넌-폴 니체 국무부 전-현정책기획실장 등 정책기획실 멤버와 소련 전문가들이 갖고 있었던 신고립주의적 관점이다. 이들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할 경우 소련이나 중국의 무력간섭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는 태평양주의라고 불리는 맥아더의 관점이다. 그는 유럽안보를 중시하는 국제주의자들의 관점에 맞서 극동지역의 중요성도 유럽 못지 않다는 견해를 펴왔기 때문에 태평양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국제주의적 관점과 유사하지만 미국 단독으로도 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국제주의적 관점과는 구별된다.
38선 돌파를 둘러싼 미국측의 논란은 인천상륙작전이 본격화 되던 9월11일 소련과 중국의 개입위협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지상작전을 38선이북으로 확대한다는 다소 엉거주춤한 형태로 결론이 났다. 보기에 따라서는 38선 돌파명령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애매한 결론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9월30일 북진명령을 한국군에 내린다. 공식명령은 아니지만 이미 서울수복 당일 38선 돌파를 천명해 놓은 터였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 (동아일보사간)"을 보자.
"9월30일 오후 부산 경무대에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중략) 일행은 인사국장 황헌친 대령,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 헌병사령관 최경록 대령 등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들 부대(38선에 도달한 부대)를 특별히 표창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정 총장" 이대통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정 총장은 어느 쪽인가, 미군 쪽인가" 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에 였다. 이대통령은 각 참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음 질문에 앞서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정총장, 그리고 여러분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았다. 이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꾸중이었다. 실내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 그 때처럼 이 대통령이 노여워하는 것을 본 적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중략) 이대통령은 끝으로 나의 결심을 물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명령을 내리신다면 제가 현지에 가서 책임지고 결정하겠습니다."
"행정관 파견할 것"
이대통령은 잠시후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우리 국군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오. 지휘권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따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즉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이오."
통령은 이어 책상으로 걸어갔다.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이것은 나의 결심이고 나의 명령이오." 이대통령은 그 종이를 나에게 주었다. "명령,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 "
이렇게 해서 정일권은 현지사정을 확인하기 위해 강릉의 제1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군단장은 김백일 준장.
정일권은 김백일과 함께 38선에 인접해 있던 제3사단 제23연대로 향했다. 전황을 간략히 파악한 다음, 10월1일 오전 11시25분 정일권은 김백일에게 38선 돌파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대전협정을 위반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38선 돌파가 이뤄졌다. 물론 그후 밝혀진 자료들에 따르면 맥아더도 이미 북진을 결심하고 있었다. 10월1일 북한에 항복을 권고한 다음 불응하면 2일 38선돌파를 명령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1일 북한측에 대해 "즉시 무기를 버리고 전투행위를 중지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 물론 북한은 응하지 않았고 맥아더사령부는 2일 자정을 기해 정식으로 북진명령을 내림으로써 이승만의 독단적 행동을 사후 추인하게 된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한국문제에 대한 전략구상의 유사성은 이미 45년 이전부터 확인된 바 있었다. 따라서 38선돌파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시간상으로 보면 이승만의 결정이 앞섰다. 그의 전략가적 면모를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는 결단이다.
이렇게 해서 북진을 거듭해 10월17일 이승만은 춘천 원주 등지를 시찰하는 자리에서 UN결의 원칙에 의한 북한통치를 공식 선언하고 수복 지구에 행정관을 파견하겠다고 천명했다.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였다.
10월20일 평양을 수복했고 24일 맥아더는 국경까지 추격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29일 평양에서 열린 평양탈환 환영대회가 열려 이승만은 감격의 연설을 했다. 당시 이를 지켜봤던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날 이대통령은 평양시청 광장에서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명연설을 하여 광장을 가득 메운 평양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연설 직후 단하의 시민들 틈에 내려가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
그러나 이때는 이미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개입(10월25일)하기 시작한 때로 12월2일에는 다시 평양을 내주고 후퇴를 하게 된다. 1 4후퇴 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