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거처 옮겨


1950년 7월 9일 이승만은 거처를 부산에서 대구의 경북도지사 조재천의 관사로 옮겼다. 미군이 참전해 7월 5일경 오산 부근에서 미제24사단 대대병력이 북한군과 교전을 하는 등 반격에 나서고 있었지만 기선을 제압한 북한의 공세는 하루가 다르게 강화되고 있었다.


미국 주도하에 UN안전보장이사회는 6월27일 한국원조를 결의한데 이어 7월7일 UN군 최고사령부 설치에 관한 영국-프랑스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써 6.25는 북한군과 UN군의 전쟁으로 그 성격이 변모되기 시작한다. 미국은 한국군이 UN군 산하에 편입될 것을 요청했다. 그 역할은 6월27일 대전에 있던 이승만에게 찾아와 "전쟁은 이미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미국의 전쟁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던 무초대사가 맡았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할 수 있는 군통수권을 넘겨주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에 의해 7월1일자로 삼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정일권은 회고록 전쟁과 휴전 (동아일보사간)에서 작전권 이양문제와 관련된 이승만과의 면담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내가 대구로 내려간 것은 7월 13일이었다.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정식부임해 오는 워커 중장을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대구 동천 비행장에서 간단한 영접행사가 있었다. 행사장으로 대구 경무대의 긴급지시가 날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흘 전인 7월9일 부산에서 대구로 올라와 있었다. 이 대통령은 경북도지사 조재천씨의 관사에 머물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도 호출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관사에 도착한 신장관과 나를 맞아주었다. 그러나 얼굴표정은 꽤 무거워보였다.


신장관, 정장군 잘 들어 주시오. 이 박사는 무겁게 입을 뗐다. 나는 오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나의 뜻이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흰종이 두 장을 탁자 위에 내놓았다. 잘 읽어보고 내가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신장관이 먼저 한장을 집어들었다. 나도 나머지 한장을 들었다. 영문서한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보인 영문서한은 일본 동경에 있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원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됐다. 맥아더 장군 귀하. 대한민국을 위한 국제연합의 공동군사노력에 있어서 


나는 그 즉시 작전권 이양에 관한 서한 임을 알아차렸다. (중략) 나는 단어 하나 하나에 온 신경을 썼다. 숨소리도 죽이면서 읽었다. 본인은 한국전 상태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며 나는 이 대목에서 두세번 되풀이 읽었다. 급박한 전황 속에서 원군의 도움이 절실했고 또 별다른 묘책이 없는 때이기도 했으나 작전지휘권의 이양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실내에는 이대통령, 신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나 세 사람 뿐이었다. 어떠한가? 신장관. 국방장관에게 먼저 질문이 떨어졌다. 잘하신 결정이십니다. 각하. 신장관은 적극적이었다. 7월7일의 유엔 안보리 결정으로 유엔군이 창설됐습니다. 또 유엔군의 총지휘를 맥아더가 맡게 된 만큼 우리 국군도 그 산하에서 함께 싸우는 뜻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장군도 그러한가? 예, 각하 하오나 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되는 점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있겠지. 나도 그 점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대통령은 되물었다. 정장군은 어떤 점이 걱정되는가 예, 지휘권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 국군의 자체편제라든지 인사문제는 절대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옳은 말이오. 우리 국군은 어디까지나 우리 대한민국의 군대이니까. 그리고 또 우리 국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전을 우리 뜻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불편한 점을 각오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언제든 되찾겠다"


그러할 때가 있겠지. 그러나 이 중대한 때에 우리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처지오. 그러니 그러한 불편을 겪더라도 그들과 작전을 원만히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므로 이 결정을 내린 것이오. 


이대통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라도 작전지휘권을 되찾아올 것입니다.


이점을 유의해서 앞으로 미군과 잘 협조하여 이 난국을 헤쳐나가길 바랍니다. "


이렇게 해서 바로 다음날인 14일 이승만은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위임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이제 전쟁은 맥아더의 손에 넘어갔다.


이런 가운데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해 전쟁발발 두달만인 8월31일 낙동강선에까지 이르렀다. 북한으로서는 6.25기간을 통틀어 최초의 세를 과시한 시기였다.


이같은 남측의 절대열세 를 일거에 역전시킨 것이 인천상륙작전이다. 맥아더는 원래 상륙작전의 귀재로 불렸다. 2차대전 당시 서남태평양 사령관으로서 그는 미군의 우세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적절히 활용하며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서태평양 일대의 군도들에서 일본군의 후방을 선제 공격해 병참선을 차단한 다음 고립된 지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과다카날 해전부터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11차례에 이르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기록의 소유자였다. 그의 상륙작전술은 개구리 뛰기식 전법이라 해서 미국의 전사에도 남아 있다.


맥아더는 6.25가 터진 직후부터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계획만 세우고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맥아더는 6월30일 인천부근에 상륙하여 병참선을 차단하고 남북에서 협공해 이를 일거에 격멸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블루하트 비밀계획을 일찌감치 세워놓았다. 작전예정일은 7월22일경. 그러나 북한군의 남진 저지를 전제조건으로 했던 이 작전은 남진을 저지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7월10일 폐기되고만다.


이렇게 해서 7월23일 새롭게 마련된 계획이 크로마이트 계획이다. 이에 따르면 미군 제1해병여단과 제2사단을 9월 중에 다음 3개 지점중 한 곳에 상륙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목표지점은 인천, 군산, 동해안 주문진 이북 등. 그리고 같은날 맥아더는 그같은 상륙작전 구상을 워싱턴에 보고했다.


워싱턴에서는 상륙작전에 대해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지점이 인천으로 굳어지자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인천은 불리하다는 것이 반대이유였다. 이런 승강이가 맥아더와 워싱턴 군수뇌부들 간에 계속되는 가운데 8월23일 동경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워싱턴에서 날아온 브래들리 합참의장,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셔먼 해군참모총장 등 3인을 비롯해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이 참석한 긴급회의가 열렸다.



맥아더 반박전문



결국 워싱턴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인천부근의 북한군 방어가 미약하다고 판단되었을 경우에만 한한다. 또한 귀관이 극동군 사령관으로서 군산에 상륙하여 적의 우측방을 포위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것을 준비하는데도 동의한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 강행을 결정한다. 상륙예정일은 9월15일.


예정대로 9월15일 한국군 제17연대등이 포함된 연합군은 맥아더의 성공적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다. 6.25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은 즉각 서울탈환작전에 돌입한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인천에서 서울탈환까지 2주일 가까운 기간이 걸렸다는 것은 이를 입증해 준다.


9월28일 서울수복. 그러나 서울수복 직전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부터 이승만 정권을 회복하려는 당신의 계획은 고위층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전문을 받는다. 미국이 이승만을 여전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즉각 현존하는 정부가 기능을 정지하였던 일이 없다는 사실에 비춰 서울의 상황이 합당한 안전을 허용하리 만큼 충분히 안정되는 즉시 (이승만)정부는 그곳으로 복귀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반박성 전문을 보냈다. 이 문제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서울 수복후 이틀이 지난 30일 이승만은 비밀리에 한국군에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소련을 비롯한 북한의 야욕을 견제하되 과잉행동으로 제3차대전을 유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트루먼의 세계전략구상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