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5-6월 부산 정치파동은 갈등의 구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평가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대단히 미묘한 사안이다.

그동안 학계의 일반적 시각은 이승만이 국회에서 재선이 어려워지자 백골단, 땃벌떼 등 각종 폭력조직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화시킨 다음 강압적으로 개헌을 한 폭거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부산 정치파동의 복합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이승만과 미국의 대립이라는 구도에서 보아야 한다. 시간적으로도 1952년 5, 6월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되고 최소한 1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많은 측면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그 대립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재선을 생각한 이승만과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차제에 미국에 대해 고분고분한 지도자로 교체하려는 미국이 정면으로 대결한 것이다.

 

당시 미국이 이승만을 거추장스러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휴전 반대였다.


 미국은 실제로 에버레디 작전이라 해서 이승만 제거 작전을 수립해두기 까지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재선구상을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한 것은 국회 내의 민국당이나 야당세력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민국당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UN군 산하에 있는 한국군 고위장성들을 통해 얼마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둔 1951년 여름부터 구체적으로 재선 구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창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일대 위기를 겪은 직후였다. 재선 구상의 징후는 여러가지로 확인된다.


 그 첫번째 가시적인 징후는 1951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담화에서 무당주의를 고수해오던 이승만이 파격적으로 정당 창당 구상을 밝힌 것이다. (이승만은 1951년 초부터 윤치영, 안호상 등 측근 인사들에게 간접적으로 정당 창당 구상을 떠보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 이 구상은 11월19일 자유당 창당으로 나타났다.


 정당에 대해 극도의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이승만이 돌연 입장을 바꿔 정당을 만든 정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재선의 발판을 마련하려면 개헌이 불가피했고, 그 작업을 수행하려면 국회 내에 확실한 여당 조직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농림장관으로 임명된 신중목이 이승만을 찾은 적이 있다.


 이때 신중목은 이승만에게 "선생님, 지금 선생님께서는 국부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굳이 자유당을 만들어 총재 자리에 앉을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이승만은 뜻밖의 말을 했다.


 " 아니 이 사람아, 삼천리 강토가 다 깨진 판에 미국 놈들 도움없이는 무엇으로 재건을 하나. 그런데 미국 놈들이 무얼보고 도와줄거야. 자유민주국가니까 돕는 것 아닌가. 민주국가란 의회정치요, 의회정치는 곧 정당정치 아닌가. 내 정당을 만들어 정당정치 하려는 것은 미국 놈들 보라고 하는거야. "


 따라서 이승만의 정당관 자체는 변한 것이 없고 재선 관철을 위해 자유당을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부터 독재라는 비판을 듣고 있던 그는 정당을 앞세움으로써 그런 비판을 막아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정당 정치의 활성화 차원에서 자유당을 창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당 창당 결심을 굳힌 이승만은 1951년 10월17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개헌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켜 자유당 창당 열흘 후인 11월30일 국회에 제출한다.


 1952년 1월8일 표결 결과 재석 1백63명 중 찬성 19표, 반대 1백43표, 기권1표로 이승만의 완벽한 패배였다. 여-야를 초월해 대통령 선거권 상실(대통령 직선제)과 입법권 양분(양원제)을 우려한 결과였다.

 

이는 오히려 민국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세력의 반격을 초래했다. 4월17일 재적의원 3분의 2를 1명넘긴 1백23명 명의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에 맞서 이승만도 5월14일 국회에 의해 부결된 정부개헌안을 다소 수정해 다시 제출했다.


 정부개헌안이 19표만 얻고 부결 당하고 오히려 국회에서 3분의 2가 넘게 서명한 국회 개헌안이 제출된 상황에서 정부 개헌안을 다시 내놓은 이승만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 엄청난 갭을 과연 어떻게 메워 나갈 생각이었을까. 그는 이미 나름의 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국회측 개헌안 제출일 4월17일과 정부측 개헌안 제출일 5월14일 사이에 이뤄진 4월25일과 5월10일의 지방의회 및 지방자치단체 선거였다.



 계엄령 선포까지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국회의 지지는 받지 못하고 국민의 지지는 받던 이승만이라는 당시의 특수한 정세가 우선 고려돼야 한다. 기존의 학계 연구는 언제나 이 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결론을 내리고 만다.


 자신을 지지하는 다수의 지방의원들을 확보한 이승만은 또 하나,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 관변-어용 폭력단체들을 동원한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공식 조직보다는 비공식 조직을 활용하기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광복후 환국해서도 정당보다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전국 규모의 운동조직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가 구상한 또 하나의 수는 군의 동원이다. 정부의 수정안이 제출된 5월14일부터 이승만은 자신의 구상을 단계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5월19일에는 국회 주변에 정체불명의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면서 국회해산을 요구했다. 공포 분위기 조성이었다. 26일 0시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전남북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종찬 참모총장은 UN군의 허가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병력파견을 거부했고, 이승만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별도 편제의 헌병사령부 산하 부대를 동원했다. 


 부산 정치 파동의 시작을 알린 5월26일 아침. 동래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광복동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설 때 헌병의 제지를 받게 된다. 검문을 거부하는 의원들과 계엄령 하에서 어떤 차량도 검문을 받아야 한다는 헌병 간의 1시간에 걸친 실랑이 끝에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끌려 헌병대로 연행됐고, 그중 10명은 구속됐다. 부산 정치파동의 서곡이었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김성수는 29일 이승만을 강도높게 비난하고 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 부산 거리에는 국회를 규탄하고 야당을 비난하는 각종 관제 데모와 벽보들이 난무했다. 6월20일 급기야 야당인사들을 비롯해 이승만에 반대하는 재야 인사들이 부산 남포동 음식점 국제구락부에 모여 호헌 구국선언 및 시내행진을 계획했다.


 주요 서명인사들은 이시영, 김창숙, 이동하, 김성수, 장면, 전진한, 백남훈, 조병옥 등등. 그러나 대회가 시작할 무렵 난입한 백골단에 의해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암살시도 사건도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6월25일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6.25 기념식장. 연설을 하던 이승만에게 한 노인이 다가가 등 뒤에서 권총을 겨눈 사건이 발생했다. 두 차례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당시 62세였던 전 의열단원 유시태였다. 이어 수사가 진행됐고 배후인물로 김시현 의원이 체포됐다. 김시현은 의열단 고문을 지냈고 김구를 따르던 임정계 인물로 이승만에 대해서는 극단적 거부감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됐다가 4.19 후에 풀려났다.


 현직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한 이 사건은 반의회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적절한 소재가 됐다. 30일 민중자결단이란 정체불명의 단체 회원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명의 의원들이 연금상태에 있는 가운데 제12회 정기국회가 개원됐다.


 개회연설에서 이승만은 20일 장택상에 의해 준비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소위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국회를 해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했다. 결국 7월4일 경찰 포위 속에 열린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은 기립투표에 의해 찬성 1백60명, 반대0, 기권3표로 통과돼 8월2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재선된다.


 이승만은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측근들에게 "이번 싸움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했던 투쟁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미국과의 투쟁이었다. 그는 그 싸움에서 이겼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는 의회정치를 압살했고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며, 불법단체들을 동원했다는 오명을 썼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