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1951년 3월을 고비로 38선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계속하며 안정화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정권을 뒤흔들 수 있는 두 개의 비극적 사건이 발생, 국회에서 폭로됨으로써 이승만은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그것이다.
3월 초순 경 피란국회가 열리고 있던 부산극장에 두 청년이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을 찾아왔다. 그중 한명은 거창 대한청년단 부단장 함차순이란 청년이었다. 이들은 신중목을 만나자마자 "거창에 큰 참변이 났다", "신원에 1천여명의 부락민들이 집단총살을 당했다"는 등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들을 돌려보낸 신중목은 사실 확인차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지리산 주변의 장성, 광양, 합천, 산청, 함양 등지의 국회의원 6명과 자리를 같이했다. 그런데 이들도 각자 자기네 지역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다고 실토했다.
그 길로 신중목은 거창 현장을 돌아보고 요로에 확인한 결과 참극이 실제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51년 3월29일 오전 국회 본회의가 열리고 있던 부산극장에 뛰어 들어간 신중목은 의장에게 비공개 회의를 요청했다. "빨갱이를 때려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없는 양민 5백여명을 살육했어요 . " 회의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 방위군 사건이 폭로돼 의원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점에서 터져나온 거창 학살사건은 실체 확인에 앞서 그 주장 만으로도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본인 신중목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날 아침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의사당으로 달려갔어요.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는 동안 어떤 이는 분을 참지 못해 명패를 집어던지기도 하고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몇번이나 회의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사편 임시수도천일 )
다음날 장면 총리를 비롯해 신성모 국방, 조병옥 내무, 김준연 법무 등 국무위원들은 의원들 앞에서 보고했다. 그런데 신성모는 "신원의 희생자는 1백87명으로 공비들에 협력했기 때문에 즉결 처형했다"고 밝힌 반면 조병옥와 김준연은 각각 3백50명, 2백75명이라고 보고했다. 국무위원들 사이에서도 혼선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신중목이 거창사건을 폭로한 그날(3월29일) 또 국회에서는 국민방위군사건 특별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이 의결됐다. 위원은 총15명으로 엄상섭, 태완선, 유홍, 백남식, 김정기, 방만수, 서민호, 조광섭, 장홍염, 김명수, 양병일, 황병규, 박만원, 소선규, 이종영 등 각 정파에서 3명씩 추천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활발한 조사활동을 벌여 정부로 하여금 진상조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 사건의 총책임자인 신성모가 경질되고 이기붕 신임 국방장관이 진상규명에 성의를 보여 6월15일 헌병사령부는 총11명을 체포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 5명은 사형을 선고받고 국민방위군사건은 일단락된다. 여기서 이승만과 관련해 거창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을 거론한 이유는 그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태도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거창-국민방위군 사건 뿐 아니라 여러 사건들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됐다는 점에서 상세한 서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해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 이라는 말이 왜 나오게 됐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거창사건이 공론화된 직후 이승만에게는 두 라인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하나는 신성모 국방의 양민학살이란 사실무근이며 양민이 아니라 공비를 토벌한 것이라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장면 총리와 조병옥 내무의 진상규명 및 관련자 엄중처벌론이었다.
이미 연초부터 국민방위군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신성모가 진상규명보다 은폐축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결정적 위기 때 마다 이승만 앞에서 눈문을 보이며 위기를 벗어나곤 해서 낙루장관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이승만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신성모는 또 하나의 논리를 내세웠다. 전시에 군이 저지른 불미스런 사건이 알려질 경우 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 증폭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원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신성모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4월말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외지들이 거창사건을 학살장면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해외여론을 중시했던 이승만은 4월24일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보라구! 치마폭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잖아. " 이승만이 연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입을 대고 훅훅 불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정부의 장관들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야 잘 되는 법이오.
거창사건으로 인해 내무, 국방, 법무, 세 장관이 서로 협력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손상되었소. 그러므로 오늘부터 신 국방과 조 내무는 즉각 사임하시오. "이때 조병옥과 함께 민국당을 대표해 거국내각 형식으로 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김준연 법무장관도 "저도 그만두겠습니다"고 말하자 이승만은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고 분노하며 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승만이 신성모와 조병옥, 김준연을 함께 해임한데는 나름의 고려가 있었다. 실제로 거창사건을 둘러싸고 신성모와 민국당 소속의 두 사람이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조병옥에 대해 평소 탐탁지 않게 생각해 왔던 그가 차제에 조병옥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 점은 그가 4월24일자로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중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확인된다.
"관두려면 관둬라"
"오랫동안 내무부 장관(조병옥)은 한민당과 흥사단의 목적을 펴나가는데 자신의 권력과 정부돈을 써왔다. "
사실 여부를 떠나 이승만이 조병옥을 해임한 배경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 4월말 경 경주, 울산 등지에 민정 시찰을 나갔다가 헐벗고 굶주린 국민방위군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시영이 5월9일 이승만의 독선, 자신의 무능과 자괴감 등을 담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 사임을 밝혔다. 이승만에게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그 소식을 듣고 "관둘테면 관두라 그래"라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신성모와 조병옥을 함께 해임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보낸다. 5월20일 경 국무회의에서의 일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변영태 외무장관이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내정키로 했다는 안건을 설명했다. 이에 5월18일 부통령으로 선출된 김성수가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기분나쁜 표정을 지으며 "이것 보시오, 부통령. 우리는 개인감정을 초월해서 국가 민족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네다. " 이에 김성수는 "신성모씨로 말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대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지금 재판에 회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요직에 중용한다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라며 맞섰다.
국무회의 의결 무시
이승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고 국무회의는 격론 끝에 토론을 거쳐 신성모의 주일공사 임명안을 부결시켜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변영태 외무장관을 불렀다. 변영태가 들어서자 마자 이승만은 "캡틴 신의 아그레망을 보내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변영태가 "그러면 국무회의 의결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반문하자 "대통령은 나야. 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하면 되는 것입네다. 내가 임명하니 장관은 내 지시대로 하면 그만입네다. " 이렇게 해서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의 실질적 책임자인 신성모는 오히려 일본공사로 떠나게 됐다.
이 무렵 이승만의 심리상태와 관련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그가 김준연, 이시영의 사임 의사를 듣고 한결같이 "관두고 싶으면 관둬"라며 극도의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 점이다. 그것은 4월11일 그가 동지처럼 여겼던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직에서 해임 당함에 따라 한국전쟁의 향방과 관련된 불안감이 아니었나 보여지기도 한다.
국가건설 초창기에 일어난 전쟁의 와중에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들, 국가의 체면손상을 내세워 사건 은폐에만 급급한 이승만과 정부, 이를 밝혀내 정부를 궁지에 몰려는 야당세력 . 이승만과 민국당 세력은 마주 향해 달리는 기차처럼 돌진하고 있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