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창당의 과정을 상세히 살피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별다른 의미를 갖기 힘들다. 오히려 자유당의 탄생에서 소멸에 이르는 전과정이 이승만의 정치역정과 어떻게 연결되고 풀어지는지를 정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4백개 정당 난립 환멸



 자유당 창당은 이승만을 하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해준 면도 있고 또 하나의 새로운 딜레마에 빠지게 한 면도 있다.


 자유당 창당 이전까지 이승만은 사실 헤어나기 힘든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시절 부터 무당주의를 확고히 견지해왔다. 우선 그가 무당주의 혹은 초당주의를 내세운 경위를 살펴보자.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왕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왕조 , 즉 군주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가 조선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국망에 이르게 된 1차적 이유가 조선의 무능한 통치에 있다고 본 때문이다. 특히 당파싸움이 국력쇠퇴의 제1원인이라고 확신했다.


 군주제에 대해 그가 부정적이었던 까닭은 그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청년시절 저작 독립정신에서 세계의 주요 정치제도를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민주제 등 세 가지로 나눈 다음 민주제를 가장 선진적인 제도로 평가한 바 있다.


 이승만의 무당주의가 공식화된 것은 1945년 10월16일 환국하면서 부터다. 일부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귀국 일성을 친일파를 끌어안기 위한 술책이라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핵심을 비껴간 억지 주장에 가깝다. 오히려 그 말은 당파주의를 경계하고 하나로 뭉쳐 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이 시기의 생각에 대해 이승만은 1950년 6월초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정당정치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오. 나는 항상 정당정치가 아직은 한국에서 시기상조라고 말하고 있소. 나는 국민에게 한국에서 정당제도가 너무 일찍 시작되고 있다고 말하오. 거기에 대한 나의 이유는 이렇소. 미국 해방군이 한국에 상륙하였을 때 미국 언론의 보도들은 40개나 60개 정도의 정당이 하루 저녁에 버섯 모양 솟아났다는 이야기로 가득하였소. 언론보도에 나타난 이러한 정당의 수가 최고 4백에 달할 때 까지 이러한 이야기는 과장하는데 활기를 띠었소. 나는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비방 운동을 중지시키기로 결심하였고 그것을 못하게 하였소. "(박일영 옮김 건국의 비화 394쪽)


 실제로 해방정국에서 한민당, 한독당, 남조선노동당, 근로인민당 등 각종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이승만은 특정정당을 만들거나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독촉과 같은 국민운동단체를 만들어 자신의 지지세력을 넓혀나갔을 뿐이다. 편지의 다음 구절은 이렇게 계속된다.


 "한국독립당과 한민당이라는 2대정당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소. 양 정당은 모두 내가 그들의 당원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나는 부인하였소. 국가이익을 위한 범국민적 운동에 초당적인 협력을 얻으려는 나의 노력 가운데 나는 양당에서 균등하게 선발된 몇몇 간부들을 뽑아 (이승만이 주도한 두 개의 국민운동단체에) 임명하였소. 이 두 단체의 유일한 목적은 전 한국 국민의 단합이었소. 그러나 나의 모든 활동에까지 영향을 주는 당파 싸움 때문에 그 성과는 실망스러웠소. 이것이 정당제도에 대하여 한국사람들이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는 하나의 증거로서 분명한 믿음을 나에게 주었소. "



 여건의 성숙 변명



 한 마디로 이승만은 당시 우리나라의 수준으로는 정당정치를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특히 나라도 세워지기 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지 모른다. 이같이 신념화한 무당주의는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계속 그의 발목을 잡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명목상의 대통령에서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전환하는데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그의 무당주의였다. 그는 1951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담화에서 "그동안 내가 무당주의를 고수했던 것은 일반 국민이 정당의 의무를 철저히 알기 전에는 정당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기가 와서 전국에 큰 정당을 조직하여 농민과 노동자를 토대로 삼아 일반 국민이 나라의 복리와 자기들의 공공복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당을 만들 때가 왔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무당주의 원칙의 폐기를 밝힌 것이다.


 그는 무당주의를 버리게 된 이유로 여건의 성숙을 들고 있지만 사실 전쟁 상황인데다가 51년의 상황이 40년대 후반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 군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 점과 관련돼 이승만에게 가해져야 할 비판은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자유당은 1952년 3월 창당됐다. 그리고 그해 5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고 7월에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첫번째 딜레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권력은 얻었지만 원칙을 잃었다.


 또 하나의 딜레마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정당을 창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없애는데 그 정당이 절대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창당의 동기가 민주주의를 위한 것보다는 이승만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더 큰 비중이 주어진데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정당정치의 활성화는 허울좋은 구호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은 무당주의로 인해 정당 정치의 태동을 가로 막았고, 자유당 창당으로 의회의 견제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민주정치 발전에 장애요인을 가져왔다는 학계의 지적은 충분히 공감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오늘날의 한국정치에서도 지도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정당이 창당되고 없어지는 상황을 감안할 때, 정당정치 문제와 관련해 이승만이 남긴 부정적 유산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첫번째 딜레마에서는 벗어났지만 두번째 딜레마에서는 희생되고 만다. 사사오입 개헌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자유당은 철저하게 이승만 개인당으로 전락했다.



 복고-가부장적 회귀



 동시에 다수여당이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함으로써 결국 의회 전체의 행정부 견제 기능이 마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물론 여기서 의회의 견제가 반드시 긍정적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이승만 식의 자유당 창당이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자유당 창당은 이승만의 통치가 원론적인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바뀌어가는 전환점이었다는 것이 정치학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권력기반이 강화된 이승만은, 그 동기가 설사 애국적인데서 비롯됐다 할지라도 정치 행태면에서 권위주의로 기울어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이 탓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올리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정치철학은 로크와 제퍼슨에서 유래된 만큼이나 공자로 부터 배운 점도 충분히 많았다. 그는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자와 같이 그는 평등을 덜 믿는 대신 상호의존의 관계를 믿었다. "


 청년과 장년시절의 민주주의자 이승만이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권력이 안정되면서 동양정신으로 회귀하여 복고적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흔히 그에게 붙여지는 명칭인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이미 1952년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