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일본관은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요하는 복합적이고 미묘한 사안이다. 그를 그저 철저한 반일주의자로 보는 것은 맹목적인 견해요, 그의 반일을 좌파학자들의 해석처럼 자신의 권력유지를 목적으로 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폄하하는 것은 공허한 견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동북아 역학 저울질
이승만의 일본관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이승만 정치활동의 상당부분을 해명해내는 단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예를 들어 그가 집권기간 동안 일본과 끝까지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은 사실을 분석하려고 할 경우, 그의 일본관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선행되지 않는 분석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저급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런 수준의 분석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늙은이의 옹고집이니 오판에 따른 역사적 과오니 하는 것들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청년기 이승만은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일본을 근대화를 위해 모범으로 삼아야 할 나라로 생각했다. 물론 일본이 한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지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는 이 책에서 "전국에 하나도 변치 않는 것이 없어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일본은 다만 그 나라 이름 두 글자 외에 변치 않는 것이 없다 하나니 이렇듯 속히 변혁함은 세계 사기에 드문 일이라. 나라에 신민된 자들로 하여금 족히 부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리로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그는 철저한 반일적 태도를 견지했다. 70 노인이 될 때 까지 반일운동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반일사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다만 여기서 그치면 이승만을 결코 일본과는 화해할 수 없는 본성적인 반일주의자라는 피상적 결론에 머물고만다.
20세기 한국인에 의해 저술된 최고의 일본론이라 할 수 있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1987년 전주대 이종익 총장에 의해 일본군국주의 실상 <나남간>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를 읽어보면 그를 맹목적 반일주의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감성적 반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북아 지역의 국제역학관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은 구조적으로 군국주의 성향을 갖고 있으며 그대로 방치할 경우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내용을 담은 이 책은 간접적으로나마 이승만 자신의 일본관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나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동기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 임을 먼저 밝힌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일본내막기는 미국에 대해 대일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일본의 야욕을 통찰하고 견제함으로써 일본과의 전쟁을 사전에 막으라는 내용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이후 국내적으로는 반민특위 해산 종용 등을 통해 친일파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로 임하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거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썼다.
이승만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여러 차례 맥아더의 초청 형식으로 일본을 방문했으나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 문제를 논의하는 차원의 방문은 아니었다. 특히 1948년 까지는 국내에서의 정치투쟁에 전력해야 했기 때문에 대일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 이승만은 장기적 관점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의 역량이 어느 정도 일본과 경쟁 가능한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가능한 한 일본과 거리를 둔다는 것이 집권기간 동안 유지된 이승만의 일본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식민지를 겪은 국민들에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소위 식민지 근성이 뿌리 뽑힐 때까지는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는 어렵다는 원칙도 깔려 있었다.
이승만이 일본문제와 관련해 1948년 부터 보여준 몇가지 언동을 보자. 그는 1949년 1월8일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대응책의 성격이 강했다. 5월20일에는 대일배상요구를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10월28일 대일강화조약이 이뤄지기 전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언명을 했다. 일본과의 급작스런 관계 단절로 생겨난 생필품 부족현상을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1950년 2월14일부터 16일까지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이 자리서 아시아의 반공을 위해 한일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일 참전 결사 반대
이런 가운데 6 25가 터진 것이다. 미국 수뇌부는 1 4 후퇴 직후 유엔군 산하에 일본군의 편입 가능성을 검토했고, 이를 알게 된 이승만은 1월12일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한국군은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에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극도의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는 맥아더도 동조해 결국 없었던 일이 됐다. 그후 같은 자유진영인 자유중국 군대의 참전가능성에 대해서도 절대 불가의 입장을 보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은 1월26일 한일 우호관계가 수립되기를 희망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상호모순되는 견해가 아니다. 이 점은 이승만이 곧 있게 될 한일회담을 앞두고 9월3일 발표한 일본의 재무장 반대와 적절한 시기에 있어서 대일관계의 단독 해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일정책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로부터 4월여후인 1952년 1월18일 이승만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을 발표했다. 소위 평화선 , 이승만라인 등이 그것이다.
평화선 설정과 관련된 이승만의 구상 및 결정과정 등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측 실무주역을 맡았던 김용식 전외무부장관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 (김영사간)에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는 한국과 일본의 원만한 관계수립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목적으로 1951년 10월20일 재일한인 법적 지위문제와 처우문제를 의제로 한일회담을 주선했다. 김용식은 하와이 총영사로 있다가 이 회담의 부수석 대표로 참여했다.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 중순 이승만은 김용식을 임시수도 부산으로 불렀다. 김용식의 증언이다.
"대통령은 동경에서 진행중인 한일예비회담의 내용을 물어본 후 대일 교섭에 대한 지시를 하였다. 미일 강화조약 발효와 더불어 소멸될 맥아더 라인을 두고 앞으로도 한일 간에 그같은 분계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
이승만이 최소한 이 무렵부터 평화선에 관한 나름의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증언은 계속된다.
" 대통령은 대마도를 큰 섬 이라고 표현하면서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유래를 말하고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간 문화재의 반환이 실현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일인과 교섭할 때의 논리전개에까지 언급하면서 빈틈없는 대일자세를 촉구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일인들은 이런 대답을 할 걸세.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돼 라고 교섭에 대한 상세한 지시를 하였다. "
미국도 부정적 태도
이런 가운데 한일회담은 계속 진행됐고 어업협정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대립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 어선은 총t수가 2백여만t이었던 반면 우리는 10만t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비와 기술이 앞선 일본어선들은 당시 한일 해상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던 맥아더 라인을 침입해 한국측에 나포된 일본어선의 수는 47년 9척, 48년 18척, 49년 10척, 50년 9척, 51년 37척으로 총82척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어선의 한국영해 침입은 계속됐고 한국어민들의 항의시위도 잇따르고 있던 실정이었다.
한국은 일본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고나면 자동 철폐될 운명에 놓인 맥아더 라인의 일시 존속을 일본에 요구했다. 일본은 물론 미국도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승만은 1952년 1월18일 전격적으로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을 발표해 일본과 미국에 맞섰다. 이를 비난하는 국제여론이 비등해지자 정부는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그 선언의 목적이 있다고 해명하며 평화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반면 일본측은 그것이 반일적인 이승만의 작품이라며 이승만 라인 혹은 이 라인이라고 불렀다.
평화선 선포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법 박사 이승만의 외교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우리나라 대일외교에서의 보기드문 쾌거라는데 의문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