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서 전화 녹음
1950년 6월27일 오후 7시경 충남지사 관저에서 무초 주한미국대사로부터 미국의 지원의사를 전해들은 이승만은 상당히 고무돼 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 국민방송을 하게 된다. 물론 이승만으로서는 전쟁이 터진 이후 3일 동안 자기신변 보호에 급급해 국민들을 챙기지 못한 점도 있었고 미국 참전을 알림으로써 국민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의 방송은 전쟁 초기의 혼란상을 극대화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빚었다.
방송과정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이승만은 무초와 만난 직후 비서진들에게 방송 준비를 지시한다. 그래서 이철원 공보처장이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당직 아나운서를 대기시켰다. 수행비서 황규면의 증언이다.
"이 박사께서는 무초대사와 만난 다음 국민을 안위하기 위해서라도 방송하는 것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철원 공보처장도 들어왔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나를 보고 방송 원고를 구술할테니 어서 받아쓰라고 해요. 방송은 그날 밤 10시에 내보내야 하므로 이박사의 구술을 다시 정서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나는 붉은 색연필로 이박사의 구술을 받아썼지요. 그 내용은 대강 UN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기-군물을 날라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취지였습니다. 문장의 서두를 다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박사께서는 즉시 전화 수화기에 대고 구술한 원고를 읽으셨지요. 이것이 그날 밤에 나간 대통령의 녹음 방송입니다.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1)
서울을 떠나기 전에 녹음을 해두고 떠난 것이 아니라 대전에서 전화로 녹음 방송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전 녹음을 했니, 대전에서 전화로 녹음 방송을 했니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이승만이 선의에서 방송을 결심하고 대전에서 전화를 통해 일단 녹음을 한 다음 방송을 했다 하더라도 불과 4시간 후면 적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지게 될 서울의 사정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채 오후 10시 부터 서울 사수 방송을 했다는 것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분명 중대한 과오이기 때문이다. 한강다리(철교 셋과 인도교 하나)의 폭파시간은 28일 새벽 2시30분 경. 중앙방송국이 이승만의 방송을 내보낸 후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던 시각과 거의 같은 시간이다.
현재까지 지적되고 있는 한강다리 폭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너무 빨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 국군이 평양 입성을 할 때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이 대동강 입구에 당도한 시점에서 다리를 끊었다. 반면 우리는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대부분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지 못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폭파를 하는 바람에 수백명의 희생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물론 한강다리 폭파는 이승만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군부의 군사적 결정 사안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 한강 폭파와 관련된 지휘 계통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국방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 등으로 이어진다. 한강교 폭파는 결국 결정적 오판 으로 판정돼 1950년 8월28일 최창식대령은 체포됐고 9월21일 사형 선고와 함께 같은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분히 정치적 희생양에 가까웠다. 결국 최창식 대령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64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됨으로써 한강교 폭파의 최종 책임소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전쟁초기에 빚어진 이승만의 녹음 방송과 한강교 조기폭파는 서로 상승 작용을 하며 참담한 비극을 만들었고 민심 이반에도 크게 작용했다.
권총차고 잠자리에
서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이승만은 그런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충남지사 공관에서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황규면은 이날 밤에 있었던 한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잠자리에 들면서 권총같은 것을 꺼내드는 것을 보았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어? 자네가 보았구먼, 권총이야. " 대통령이 내민 소형 모젤 권총엔 탄환이 장전돼 있었다. "내 아까 누구보고 얘기하여 한자루 구해달라고 했지. 급해지면 나도 한두놈쯤 거꾸러뜨릴 수 있지 않겠어. 마지막 남는 총알은 우리 몫이고 " 대통령은 이때부터 부산 피란시절 3년동안 하루도 안 빼고 이 권총을 침대 머리맡 시트 밑에 숨겨놓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부산일보사편 임시수도천일 )
이승만은 그후 대전에 3일을 머문 후 전황이 계속 어려워지자 다시 피란을 준비한다. 비가 쏟아지는 7월1일 새벽 3시 이승만은 이철원 공보처장을 비롯해 김장흥 경무대 서장, 전용 운전사 김국진, 경호경찰관 10명 등 15명 정도가 이승만의 피란길을 수행했다. 목적지는 부산. 그런데 미국측 정보는 대구 쪽이 위험하다고 했다. 한국경찰 정보도 "대구지역에서는 유격대 출몰로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다"였다. 결국 김장흥의 "이리를 거쳐 목포로 내려가 배편으로 부산으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도로 포장도 변변치 않던 시절. 이승만 일행은 억수같은 비를 뚫고 목포를 향해 달렸다. 경호 경찰의 지프 1대가 고장나 낙오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이리에 도착해 기차로 갈아탔다. 이때 경호경찰 10명은 이리에 남았다가 부산으로 오기로 하는 바람에 이승만일행은 프란체스카를 비롯해 이철원, 황규면, 김장흥 등 5명뿐이었다.
목포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 비바람이 몰아치는 육상과 마찬가지로 해상도 거센 폭풍우가 불고 있었다. 여수동쪽 해상은 폭풍우가 심해 위험하다 는 목포 경비부 사령관 정긍모 대령의 보고를 받고 비서진은 망설였지만 이승만은 강행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일행이 목포를 출발한 것은 1일 오후4시.
일행을 태운 해군 목포 경비부 소속 5백t급 제514함과 3백50t급 제309함은 밤을 꼬박새우며 19시간 동안 거친 폭풍우 속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2일 오전11시 무사히 부산항 보급창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경상남도 지사 양성봉 부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임시수도 천일이 전하는 당시의 생생한 상황이다.
갑판 승무원들 격려
양지사는 이처장과 황비서에게 "각하께서 부산시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지 않을 것입니까"고 물었다. 두 사람이 무어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대통령이 재빨리 가로챘다. "뭐라구? 도망나온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모두들 관둬!" 대통령의 음성은 약간 노기를 띠고 있었다. (해군함정에서) 한발 내디디려다가 대통령은 힐끗 뒤를 돌아봤다. 폭풍우를 무릅쓰고 목포서 부산까지 장장 19시간동안 2m가 넘는 파도와 사투를 벌이면서 대통령을 태워온 두 배의 해군 승무원 50명이 갑판에 도열해 있었다. 대통령은 뒤돌아서서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갔다. 514함정장 주철규소령과 309함정장 김남교소령 그리고 승무원 50명의 등을 일일이 두드렸다. "참으로 훌륭했어! 그만한 항해 기술이면 공산괴뢰군 쯤이야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겠어. 정말 고생했어.
이승만은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마련된 관저에 들어서자마자 대전에 있는 신성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성모는 2일 정오 현재 한강방위선은 뚫리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한강방위선은 3일 무너졌으며 대전 함락은 20일이었다. 이승만은 화가 날 때면 으레 그랬듯이 양손을 입에다 대고 훅훅 불며 말했다. "내가 잘못 판단했어. 이렇게 빨리 부산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미국사람들 정보는 왜 이렇게 엉터리가 많지. "( 임시수도천일 )
이처럼 전쟁초기 이승만은 본인의 잘못이건, 참모의 미숙이건 간에 잇따른 판단미스를 범하고 있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