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한 해 동안 국회는 반민특위법, 국가보안법, 농지개혁법, 미군철수 긴급동의안 등의 통과를 둘러싸고 사안에 따라 이합집산을 계속했다. 제헌의원들의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했던데다가 의회활동의 미숙 등이 겹치면서 각종 파쟁들이 이어졌다. 심지어 1949년 5월20일에는 소장파 의원 다수가 남로당의 프락치 혐의로 대량 구속된 국회프락치 사건까지 일어났다.
상황 따라 협조-대립
이런 사안들마다 이승만은 어떤 형태로든 관계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나름의 견해를 피력해 가며 협조와 대립을 형성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이승만의 정치관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반민특위 해산의 경우 국회내 무소속 소장파들이 주동이 되고 한민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이승만이 한민당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948년 10월13일 40명의 의원에 의해 제출된 미군철수 긴급동의안의 경우도 소장파들이 원외의 김구가 내세운 남북협상 및 외국군 철수 주장과 맞물려 이승만과 한민당에 압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승만과 한민당이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안보유지라는 이승만의 입장과 기득권 수호라는 한민당의 이해관계가 일정부분 맞아 떨어진 결과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농지개혁을 둘러싼 한민당(이어 민국당)과의 갈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농지개혁은 이미 헌법 제86조에 농토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서 정한다고 명시됐을만큼 대다수가 농민인 국민 전체의 요구였다. 더욱이 북한은 이미 그것의 성패를 떠나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토지 개혁을 실시한 후 남한의 농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상대적우위를 선전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농지개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지주 세력과는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이승만의 경우 농지개혁에 대해 소극적일 이유가 없었다. 김일영 박사는 자신의 학위논문 '이승만 통치기 정치체제의 성격에 관한 연구'에서 "지주를 물적 기반으로 하는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이승만으로서는 그것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승만이 평소 농지개혁에 적극적 입장을 보였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에 앉혔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농림부의 농지개혁법 초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지주에 대한 보상은 연평균 생산량의 1백50%로 하며 ②공채상환은 3년 경과후 10년간 균등분할 지급하고 ③농지는 호당 2정보씩 분배하며 ④상환은 연평균 생산량의 1백20%를 6년에 걸쳐 분할 납부한다.
그러나 이 초안은 기획처의 심의를 거쳐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①지주보상액과 농민상환액을 2백%로 같게 하며 ②지주보상에 있어 3년 경과후라는 조항을 삭제하고 그 대신 보상과 상환기간을 10년으로 통일한다. 농민 위주의 농림부 초안에 비한다면 상당히 지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된 것이다.
이처럼 수정된 배경과 관련해서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야합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현실적으로 국가의 재정부담을 덜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 이승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가진 김일영 박사도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고 한민당 및 남로당의 농촌 지지기반을 불식시키기 위해 하루빨리 농지개혁을 단행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며 "그러나 농림부의 안을 그대로 시행할 경우 농민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한민당 계열의 적극적 반대에 부딪혀 국회통과도 어려울 뿐더러 지주보상액과 농민상환액 사이의 차액을 결국 정부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이승만으로서는 농림부 초안이 썩 달가울 수 만은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상당히 타당한 분석으로 보인다.
소장파-한민당 대결
그런데 문제는 농지개혁법안이 1949년 2월 국회에 제출되면서 발생한다. 국회의 산업위원회 산하 농림분과위원회에서는 정부안을 참조하여 별도의 산업위원회안이라는 것을 작성해 3월 국회에 제출했다.
우선 산업위원회안의 골자부터 살펴보자. ①지주에 대한 보상은 연평균 생산량의 3백%로 하며 ②공채상환은 10년간 분할지급하고 ③농지소유상한은 3정보로 하며 ④농지를 부여받은 농민은 연평균 생산량의 3백%를 10년동안 분할상환하고 ⑤농지를 매수당한 지주들이 유망한 사업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배려한다.
농림부안이나 기획처안과 비교할 때 노골적으로 지주 중심의 안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소장파 의원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보상 및 상환비율은 1백~1백50%로 하고 농지소유상한은 2정보로 하며 사업체 참여 알선은 지주 계급에게 새로운 경제권을 장악하게 하는 것이므로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한민당이 대한국민당의 일부(신익희) 및 대동청년단(지청천)을 끌어들여 1949년 2월10일 새롭게 창당한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이 보상 및 상환율에서 양보하고 소장파가 농지소유상환에서 3정보를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절충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통과시켜 5월 정부로 법안을 이송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법안의 조문들 간에 상호 모순되는 점들이 있고 정부의 재정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공포를 미루다가 결국은 6월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게 된다. 그러나 법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7월부터 즉각 개정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이전과 달랐다.
5월과 6월에 걸쳐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소장파 의원 그룹이 치명타를 입었기 때문에 민국당의 발언권이 훨씬 커졌다. 국회내 의석수 면에서도 70여명이나 됐고 내각에도 김효석, 임병직, 윤보선, 허정, 신성모, 장기영 등 7명이 민국당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재개된 농지개혁법 개정작업은 김일영 박사의 표현대로 하자면 지주 이익 증대를 위한 경연장이었다.
결국 지주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각종 장치들을 마련한 후인 1949년 12월이 돼서야 수정안이 본회의에 제출됐는데 그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원안에 각각 1백50%와 1백25%로 5년간 분할하도록 돼 있던 지주보상액과 농민상환액을 공히 2백40% 8년분할로 높이고 ②지가증권을 기업자금에 사용할 경우 정부가 융자 보증을 해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다. 소장파들이 사라진 시점에서 이승만은 거의 혼자서 관련 의원들을 불러 설득하기도 하고 논쟁도 벌이고 해서 결국 보상과 상환이 1백50% 5년분할로 규정된 농지개혁법 개정안이 1950년 2월 국회에서 통과되고 3월 공포되기에 이른다.
세마리 토끼 잡아
이로써 이승만은 세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첫째는 지주가 중심이 된 민국당의 경제적 기반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두번째는 비록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지만 농민에게 토지를 주는 농지개혁을 완수함으로써 남로당의 공세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점은 6 25 당시 적 치하의 농민들이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식 토지개혁에 휩쓸리지 않은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세번째는 농지개혁으로 양상된 소농들을 확고한 지지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안정적 정치기반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수많은 실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농지개혁에 의해 자기땅을 갖게 된 소농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의 상당수 학자들은 남한의 농지개혁을 무조건 실패한 것으로 매도해왔다. 그 저변에는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는데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는 단순 논리가 깔려 있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지주에게 공짜로 빼앗아서 농민에게 공짜로 주는 것이므로 철저하게 농민을 위하는 정책이 아니냐는 비현실적인 논거까지 거들었다.
굳이 북한의 농업이 그 이후 집단농장화하고 최근에는 피폐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지 않더라도 한민당과 이승만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진 남한의 당시 농지개혁을 무조건 실패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단견에서는 벗어나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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