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7월 27일 고종의 최종 재가로 태 1백대 및 종신 징역으로 형이 확정돼 이승만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다. 그러나 탈옥에 실패한 1월30일부터 이때까지 6개월은 이승만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기간이었다.


우선 닥친 것은 고문이었다. 1899년이라는 시기는 전근대적 형벌이 대부분 온존해 있었기 때문에 고문 또한 야만적이었다. 특히 경무청으로 끌려간 그를 고문한 사람은 박돌팍(박달북)이라는 인물로 황국협회 회원이었으며 열렬한 왕당파였다. 당시의 상황을 이승만은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죽고싶었다" 회고


"그는 왕당파로 나와는 사무치는 원수였다. 박은 황실에 연락을 하여 황제로부터 고문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캄캄한 방에 눕혀 놓았는데 나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를 못했다. 그리고 나는 또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때 나는 그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을 풀어대는 그들은 격분한 동물들 같았다. 족쇄, 수갑, 형틀 . "


그는 수시로 불려가 주리가 틀린 채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이원순씨의 전기 인간 이승만 은 고문상황을 소상히 적고 있다.


"뒤로 돌려진 그의 팔은 살 속을 파고 드는 끈으로 꽉 묶여 있었다. 무릎을 꿇은 다리 사이에 두 개의 나무를 끼게 하고 무릎과 발목을 묶어 그 뒤에서 두 명의 경리가 통나무로 내리치고 있었다. 또 삼각형으로 날카롭게 깎은 대나무를 손가락 사이에 끼어 뼈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누르기도 했다. 매일같이 마루 위에 엎어 놓고 살가죽이 빨갛게 벗겨질 때까지 대나무로 후려치기도 했다. "


이 때의 고통 때문에 그는 40년이 지난 1939년에야 비로소 붓글씨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될 만큼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훗날 77세 때 올리버 박사가 쓰고 있던 자신의 전기를 위한 메모에서 "이따금 나는 꿈 속에서 감방에 들어 있다"고 쓰고 있다. 또 올리버 박사가 그 때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자 "내게 그걸 잊어버리게 해주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문과 같은 신체적 고통은 오히려 사형이 선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비하면 정신적으로는 훨씬 나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판결을 앞둔 그가 느꼈던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감옥으로 간혹 가족들이 면회를 왔는데 어느날 그는 이제 다시는 가족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친께 불효한 자식 하나 안 두신 셈 치시고 길이 잊으시옵소서 라고 유서를 썼다. 언제라도 사형집행이 되면 옆사람에게 전할 요량으로 몸에 끼고 있었는데 어느날 해질 무렵 문득 이승만이 투옥돼 있던 제5칸 감방문이 열리며 옥리가 들어섰다. 이승만은 "이제 틀림없이 내 차례구나"라고 생각하고 가슴팍에 있던 유서를 재빨리 옆 사람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옥리는 공교롭게도 이승만의 유서를 받아 든 그 사람을 끌고나갔다.


이승만의 전기를 쓴 시인 서정주씨는 이 때의 상황을 "사형선고와 동시에 집행됐던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태1백대와 종신징역은 불안감이 제거 됐다는 점에서 이승만에게 구원의 메시지였을 수도 있다. 태1백대 와 관련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당시 형법인 형률명례(1896년 제정된 것으로 조선시대 형법이 근대형법으로 넘어오는 과도기 법률이다. 징역형과 태형이 병행된 것도 그 때문이다)는 징역 1년 이상의 죄수에게는 10대에서 1백대까지 태형을 함께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태1백대 란 태형 중에서도 최고형이었던 것이다.


이 형이 정식으로 집행됐다면 이승만은 목숨을 잃거나 겨우 부지하더라도 정상인으로 살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특히 그의 태형을 맡은 옥리는 탈옥사건때 총상을 입은 김윤길이란 사람이었고 재판장 홍종우도 관례에 따라 입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종우는 매질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나가버렸고 김윤길은 매질하는 시늉만 했다는 것이다.



서구 정치관 공부



종신 징역이 확정된 이승만은 목에는 10㎏ 가량 되는 칼, 두 손에는 수갑을 차고, 발은 형틀에 끼워진 채 있어야 했던 6개월 간의 구치시절 에 비해 모든것이 월등히 나아졌다.


이승만은 옥중에 있으면서도 가족들을 비롯한 외국인 친구들을 수시로 만났다. 여기에는 그의 정치노선을 마음 속으로 따랐던 간수장 김영선과 차장 이중진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 가족들 중에서 그가 특히 보고 싶어한 것은 당시 서너살 된 외아들 태산이었다(이승만은 16세 때인 1891년 동갑내기 박씨와 결혼해 외아들 태산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박씨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1904년 미국유학을 떠날 때에는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으며 그렇게 좋아했던 외아들 태산은 그가 조지 워싱턴대학에 다니던 1906년 2월 25일 미국에 왔다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어떤 때는 아들과 감옥 안에서 함께 지내고 다음날 보내기도 했다.


배재학당의 헨리 아펜젤러, DA 번커, 제중원의 애비슨, 호레이커 언더우드, 제임스 게일 등도 그를 감옥으로 자주 찾았던 미국인 친구들이다. 이들이 이승만을 좋아했던 것은 영어를 열심히 하는 이승만이 귀엽기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종교적 동기였을 것이다. 특히 이승만이 영어와 기독교에 열심이고 연설 능력도 뛰어나 대중을 끄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의 전도사로 적격이라고 여기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승만은 감옥에 있는 기간 동안 죄수 40여명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리고 밤에도 양초를 구해 성서를 읽을 만큼 기독교 공부에 열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에게는 언제나 영혼 구제도 중요하지만 나라구제가 더 시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펜젤러와 번커는 옥중으로 전망(the outlook) , 독립(the independent) 등 국제 정세를 다룬 영어 간행물과 각종 단행본들을 들여보냈다. 이는 배재학당에서 배운 초보적 신학문을 통해 눈뜬 서구문물에 대한 식견이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특히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로서는 이런 영어서적들을 통해 나름대로 서구적 정치관을 세워갔을 것이 분명하다.



개화파 거의 투옥



정치인 으로서의 이승만과 관련해 감옥시절이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이 곳에서 인맥 을 형성하게 됐다는 점이다. 1902년 1월30일 그가 갇혀 있던 감옥에는 어린 시절 글 벗이며 배재동문인 신흥우가 3년 징역의 유죄판결을 받고 들어온다. 뒤이어 일본서 교육받은 소장 장교들로서 쿠데타 실패와 관련된 장호익과 그의 동료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들 중에는 유길준의 친동생인 유성준도 포함돼 있었는데 이승만은 특히 유성준과 가까이 지냈다.


6월이 되면 독립협회 간부였던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등 개화파의 거물들이 대거 들어온다. 이들의 죄목은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것. 그 밖에 이준, 양기탁, 안국선 등이 함께 있었고 그의 최대 정적이 된 박용만도 들어와 있었다. 당시의 개화파 젊은이들이 모두 감옥에 모인 셈이었다.


1903년 1월19일자 황성신문에는 옥수교육 감옥서장 김영선씨가 월 전부터 감옥서 내에 학교를 설립하고 죄수를 교육하는데 교수는 이승만, 양의종씨요 교과서는 개과천선할 책자요 영어, 산술, 지지 등 서로 열심히 교도하는 고로 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점은 이승만이 1905년 신학월보 5월호에 기고한 기명 논설 옥중전도에 나오는 다행히 본서장 김영선씨와 간수장 이중진씨가 도임한 이후로 옥정도 차차 변하여 진보한 것이 많거니와 총명한 아이들을 교육할 일로 종종 의론하다가 작년 음력구월(1902년 10월경)에 비로소 각간에 있는 아이 수십명을 불러다가 한 칸을 치우고 가갸거겨를 써서 읽히니 혹 웃기도 하고 혹 흉도 보고 혹 책망하는 자도 있는지라 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옥중에서도 국민계몽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도서관까지 운영



옥중학교와 함께 또 하나 흥미있는 일은 옥중 도서관을 운영한 것이다. 도서관이 설치된 시기는 학교 설립과 거의 같은 1902년 12월 경이었다. 크리스마스때 옥중에서 관원과 죄수들이 회식을 하기 위해 돈을 모은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 이 소식을 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가로 돈을 내고 이 돈을 모아 책을 구입하고 책장도 만들고 해서 그런대로 구색을 갖춘 도서실이 감옥 안에 생겨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해 이승만은 신학월보에 기고한 글에서 영서 국문 한문의 모든 서책이 지금 있는 것이 이백오십여권인데 처음 십오일동안에 책 본 사람이 이백육십팔인이오 지난달은 한달 동안 모두 이백사십구인이다 라고 적고 있다.


책을 보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 무렵에 이승만은 영어사전을 만드는 일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얼마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서 독립정신 집필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사전만드는 일은 중단됐다.


1904년 2월10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2월19일 이승만은 그의 첫저서 독립정신 집필을 시작해 6월29일 완료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6년 후인 1910년 2월10일에야 미국에서 겨우 출판됐다. 


이처럼 체포, 탈옥, 재수감, 고문, 종신형선고, 개종, 개화파 동료들과의 만남, 옥중전도, 옥중학교와 도서관운영, 사전집필, 독립정신 집필등으로 이어진 감옥생활은 1904년 8월9일 갑작스런 황제의 석방결정 으로 끝맺게 된다.


옥중생활은 이승만에게 견디기 힘든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안겨다 준 기간임과 동시에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을 이겨내고 정신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준 기간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옥중생활 연보


1899년 1월9일 체포

1월30일 탈옥 실패

3월18일 첫공판

1900년 중국인 채이경이 쓴 중동(청일)전기본말 번역

1901년 2월~1903년 4월17일 제국신문 에 옥중논설 집필

1902년10월 옥중학교 설립

1903년 1월 옥중도서관 설립

1904년 2월~6월 독립정신 집필

1904년 8월9월 석방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