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이 가슴 속에 피가 끓는데

더구나 비뿌리고 바람 치다니

농 안의 두루미 생각은 만리

숲 속에 깃든 새다 꿈이 외로워

조찰한 보따리라 책 밖에 없고

목숨을 아끼오리 칼만이 알어

여보소 돈 없다 한탄을 마소

가난에 얽매여 일 못한 겐가

(일생흉해불평명/우타풍번랑역경/농학요회운만리/임금고몽월삼경/협서 위반행장중/갑검지심성명경/세사황금수처유/빈한나득오경영) .


청년 이승만이 오랜 감옥생활 속에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뢰중술회 라는 제목의 한시다. 열혈애국청년으로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수구파의 음모로 옥에 갇히게 된 그는 이 시에서 비록 억류된 생활에다 가진 것은 없지만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이 감옥에 있었던 만5년7개월 동안 그는 일생동안 간직하게 될 사상의 틀과 인맥 등 대부분을 형성했다. 그는 감옥에서 제국신문에 계속 논설을 쓰며 그의 사상을 펼쳐 보인다.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군주제를 폐지, 공화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구상까지 구체화했다. 국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외교론을 정립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감옥에서의 논설들은 후에 출간한 그의 독립정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감옥에서였다. 이런 점에서 청년기의 감옥시절은 고통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앞으로의 사상적-정치적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이승만이 체포된 것은 그의 나이 24살때인 1899년 1월9일이다. 그가 체포돼 장장 6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875년 3월26일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몰락한 선비였던 부친 이경선과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 6대독자로 태어난 이승만은 3살때부터 서울로 이사와 서울역 근처 우수현에서 20살까지 살았다.


18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일찍이 문재를 보였지만 과거에는 번번이 낙방해(일설에는 단 한번 응시했다고도 한다) 관으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으로 온나라가 어수선했던 1894년. 청년 이승만은 자신의 인생에서 일대전기를 맞게 된다. 배재학당에 입학해 신학문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좋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이승만은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입학한지 1년도 안된 1895년 8월에는 초급영어반의 교사로 발탁되었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주시경도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함께 다녔던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러, 이승만은 정치를 하러 배재를 다닌다"는 말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승만의 정치의식이 매우 일찍부터 싹튼 것 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신학문과 서구문물에 눈을 뜬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한 직후 부터 개화파의 본거지였던 독립협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898년 3월10일 제1차 만민공동회에서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 협성회에서 익힌 웅변술을 바탕으로 열변을 토해 일반민중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게 된다.


독립협회의 청년지도자 이승만. 당시 민중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애국심으로 충만한 이 청년에게 더할 수 없는 신뢰를 보내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이승만의 투옥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구파에서는 일찍부터 개화파의 떠오르는 지도자 이승만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데다가 고종폐위 음모와 관련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박영효의 귀국추진 움직임에 이승만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은 적절한 모함의 소재가 되었다.


그가 갇혔던 감옥은 서소문 근처에 있었는데 이승만이 알고 지내던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힘을 써 최정식, 서상대와 한 감방을 썼다. 최정식은 매일신문 에서 함께 논설을 맡고 독립협회 활동도 같이 한 적이 있는 개화의 동지이며 서상대도 박영효의 측근으로 그와는 가까운 인물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탈옥을 도모한 것이다. 탈옥의 과정에 대해서는 두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1899년 7월11일 평리원(고등재판소)에서의 판결선고문을 보면 탈옥의 주범은 최정식이고 이승만은 종범으로 돼있다. 이에 따르면 최정식이 "그대와 나는 모두 민회에서 저명한 사람인데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소"라며 탈옥을 권유하자 이승만은 "내가 죄가 없는데 죽기야 하겠소"라고 소극적 답변을 한 것으로 돼있다.


반면 이승만의 전기들에서는 그가 주동을 하고 최정식과 서상대가 따른 것으로 돼 있다. 이승만이 두 사람을 설득하고 주시경을 통해 미리 만민공동회의 응원대를 조직시켜 종로의 집회에 참여한다는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중형을 면한 이승만이 탈옥을 도모했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몇달째 감옥생활을 해온 최정식이 제안하고 알렌의 요구가 묵살된 데 불안감을 느낀 이승만이 동조하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여튼 이들은 1월30일 오전 주시경이 구해 최정식 집안의 식객인 최학주를 통해 반입 시켜준 권총을 갖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옥을 결행한다. 이승만은 곧바로 체포되고 최정식과 서상대는 탈옥에 성공하지만 그후 최정식은 4월24일 평안남도 증남포에서 체포됐고 서상대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3월18일 첫공판에서 이승만은 황성신문에 "이승만은 사형을 면키 어렵다"는 기사가 날만큼 사형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재판장 또한 그의 천적이며 장차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였기 때문에 당시 이승만이 느꼈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무렵 이승만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7월11일 운명의 날. 재판장 홍종우는 전혀 뜻밖에도 이승만에게는 태일백 및 종신징역 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최정식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