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이후 이승만의 대미 외교활동은 다시 지지부진한 상태로 접어든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은 1943년 중반부터 유럽전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국문제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던 때문이다.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한길수란 인물도 걸림돌이었다. 국무성에서는 애당초 이승만을 골칫거리 노인네 정도로 생각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차에 한인사회를 대표한다는 또 한명의 인물이 등장하자 한인사회의 분열 때문에 임정을 승인할 수 없다는 명분을 적극 내세우며 이승만에게 비협조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일화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있을 때 그의 집 주변에는 동물원이 있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손에 모이를 놓고 뜰에서 몇 시간이고 그냥 손을 뻗고 서있었다. 팔이 아프면 쉬다가 또 팔을 뻗고 서있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새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며칠 동안 시간만 나면 계속해서 그러고 서있었다. 마침내 새 한마리가 조심스레 이승만의 손에 날아와 모이를 쪼아먹기 시작했고 잠시 후 많은 새들이 날아왔다. 그것을 보고 프란체스카는 재미있어 하며 열심히 모이를 이승만에게 갖다 줬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이승만의 면모 중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쉽게는 그의 인내심을 설명해주고, 좀 복합적으로 말하자면 사물의 본질을 통찰한 다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이 달성될 때까지는 한눈 팔지 않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그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물의 본질을 통찰한다는 것은 사태의 진행을 미리 간파한다는 뜻이다. 결국 현재의 사태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의견이 다를 수 밖에 없고 이들과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승만이 설득형이 아니라 자기 견해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형이라는데 있다. 따라오면 데리고 가고 그렇지 않으면 버린다는 것이 이승만 리더십의 전형이었다.
골칫거리 노인네
1943년 중반 그는 내외로 어려움에 휩싸였다. 미국무부는 소련을 견제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견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임정승인 요청은 아무런 진척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42년초 부터 관계를 맺고 활성화될 듯 하던 군부와의 관계도 더 이상 발전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를 정말로 곤란에 빠뜨린 것은 이같은 외부와의 관계보다는 재미한인사회 내부의 갈등이다.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발족된 연합위원회와 이승만의 갈등이 그것이다. 1942년 중반부터 연합위원회는 이승만에게 구미위원부를 해산하고 연합위원회 산하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만 활동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생각이 달랐다. 구미위원부는 임정의 기관이므로 연합위원회가 구미위원부의 산하 기관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갈등은 결국 1943년 9월 이승만을 지지하던 동지회의 연합위원회 탈퇴로 이어진다. 그래서 연합위원회는 1944년 6월 구미위원부와는 별도로 워싱턴 사무소를 개설하고 책임자로 김원용을 선정한다. 이 김원용이란 인물은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며 반이승만의 선봉이었다. 지금도 이승만의 재미활동을 비판할 때 반드시 인용되는 책 "재미한인 50년사"는 바로 김원용이 쓴 책이다.
"소련 야심 막아야"
이때 부터 이승만의 생각은 전후 한국상황의 문제에 집중된다. 이제 일본을 한국에서 내쫓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무부에 가서 하는 얘기의 메뉴도 바뀌었다.
소련이 한국에 소비에트 위성국을 세우려 하기 때문에 임정을 승인해야만 소련의 야심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국무부의 소장관리들은 주로 소련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한국독립은 좌우연합정부에 의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강력히 이에 반대했다.
1945년 이승만은 만 70세였다. 이승만은 4월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유엔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정부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석하기 위해 임정 대표단을 구성했다. 문제는 연합위원회 워싱턴사무소와 중한민중동맹의 한길수도 각각 회의사무국에 참석을 신청했다.
다시 분열상이 드러난 것이다.
이들은 며칠 간의 논쟁을 거쳐 겨우 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접수 자체를 거부당했다. 사무국장이 다름 아닌 친소련인물 앨저 히스였던 것이다.
이때 부터 이승만은 일본의 항복소식이 전해진 1945년 8월15일까지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945년 8월14일 밤11시(미국시각). 일본의 항복소식이 라디오 임시뉴스에서 흘러나왔다. 이 시간 바로 곁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회고담이다.
"그 분은 임시뉴스를 듣다 말고 벌떡 일어나셨어요. 이봐, 일본이 항복했어. 우린 귀국하는거야. 그 분은 제 손목을 꽉 붙잡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죠. 그저 눈물을 글썽이면서 제 손만 꽉잡고 계셨습니다. 전 얼떨떨한 가운데 이분이 너무 흥분하셔서 어쩌나 하는 염려마저 들었습니다. "
잠시후 워싱턴에 살던 동포들이 이승만이 살던 마운트 플리전트의 2층 벽돌집으로 몰려들었다. 이 집은 이승만이 일본내막기의 인세로 1만달러에 산 집이었다.
오랜 기간 곁에서 이승만을 도왔던 임병직도 그때 달려간 동포들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문을 박차고 뛰어드니 이박사 내외 분은 멍청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계셨습니다. 큰 충격에서 깨어난 모습이었습니다. 한참 계시더니 병직이 이젠 돌아가자, 돌아가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군요. "
그러나 쉽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곳은 아직 완전 독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즉각 출국 수속에 나섰다. 처음에는 순조로운듯 했다. 그가 마닐라를 거쳐 서울로 가겠다는 여행계획을 세워 국무부 여권과장 루스 쉬플레이 여사에게 여권을 신청했다. 9월5일 쉬플레이는 제임스 번스 국무장관으로 부터 이승만의 여권 발급을 재가받았다. 그리고 아직 한반도는 군 작전지역이었으므로 국방부의 허가도 필요했다. 현지 사령관 맥아더는 그의 여행을 허가했다. 그래서 국방부 스와니 대령이 고등판무관의 자격으로 이승만이 귀국할 수 있게끔 허가서를 발급해주었다.
드물게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국무성 관리 매닝이 이승만이 타고 갈 항공기를 마련하는 동안 국무장관실에서는 이승만에게 고등판무관이라는 직함을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여권발급을 취소하도록 명령했다. 21일 매닝은 이승만에게 쉬플레이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직함은 필요없으니 귀국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등판무관 취소
이에 따라 다시 군당국으로부터 직함을 생략한 허가서를 발급받아 국무성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무성이 그의 여행에 협조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리고 국무성은 이승만이 가더라도 오키나와나 동경에 착륙할 경우에는 맥아더 장군의 특별허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승만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맥아더장군의 결정적 도움을 얻어 겨우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승만은 10월5일 뉴욕의 라 구아디아 공항을 출발했다. 비행장에는 프란체스카와 미국인 친구들 그리고 구미위원부 임원들이 나와 노항일운동가의 귀국을 전송했다. 그는 하와이, 괌을 거쳐 10월16일 김포에 내렸다. 33년의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도착한 것이다.
이승만의 귀국지연. 거기에는 한길수를 지원하고 이승만을 반대했던 국무부 내 반이승만 성향의 관리들의 배후작용이 컸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반도의 정세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의 대소-대한정책이라는 관점에서 이승만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건, 소련과의 협상을 꾀하건 미국(특히 국무부)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의도에 순순히 따라줄 인물이 적당했지만 이승만은 국무부가 4~5년 동안 그에게 시달리면서 경험한 대로 한국의 독립을 절대시하고 소련에 적극 반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의 해방정국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승만에 관한 한 그의 해방전 경력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미국의 앞잡이 , 정치 술수꾼 정도로 폄하해 왔다. 그러나 그는 귀국 전이나 후에도 국무부와는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의 앞잡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며 정치술수꾼이라는 비난 또한 귀국 전에 그가 소련을 비롯한 당시 한반도의 국제정세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연구결여에서 나온 피상적 주장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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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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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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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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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