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3월26일 이승만은 중풍으로 고생하던 부친 경선공과 작별하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일본행 배에 올랐다. 부친은 1913년 12월5일 사망했으므로 이것이 그로서는 부친과의 마지막 이별이기도 했다.
일 유학생들에 연설
미국인 선교사 2명, 한국인 목사 1명과 동행한 그는 동경 YMCA에서 강연을 하고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4월6일에는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이 마련해준 송별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인 전법무부장관은 당시의 자리를 이렇게 증언했다.
"이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유학생들은 송별회를 마련했다. 장소는 유학생들이 자주 모이던 요리점이다. 유학생들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을 받아 이박사는 여러가지 말을 했는데 회식장은 마치 울분을 토로하는 장소 같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유학생들은 우리가 나라를 잃은 까닭은 국제적으로 진출을 못했고 국제적인 발언권이 없는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던 터라 이박사가 국제적인 인물 됨에 많은 존경을 보냈다. 그리고 막연하나마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도 기억한다. "(1975년 한국일보 기획 '인간 이승만 백년' )
이날 모임의 참석자는 송진우, 안재홍, 김병로, 최두선, 현상윤 등 쟁쟁한 인물들이다.
일본에서의 일을 대략 마무리 지은 이승만은 일행과 함께 4월10일 요코하마에서 미국행 기선 단파마루(란파환)에 올랐다. 배웅나온 서울 감리교회의 한 일본인 목사는 이승만에게 "앞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데 지장을 초래할지 모르니 미국에 가더라도 일본에 대한 비판은 삼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미국행에는 해리스 감독이 합류했다. 그는 이승만을 세계감리교대회의 한국측 평신도 대표로 천거한 인물이었다. 감리교의 동북아 총책임자인 해리스 감독은 주로 일본에 머물며 한-일 양국의 감리교를 통할했던 인물로 선교 목적상 일본 쪽에 기울어 있었다.
배 안에서도 해리스 감독은 이승만에게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보여준 이승만의 성격대로라면 멱살잡이라도 해야겠지만 식민초기의 삼엄한 통치를 목격한 뒤여서인지 각종 전기들을 보면 가만히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쩌면 속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행은 캐나다 서해안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빅토리아에 상륙해 미국 시애틀을 거쳐 세계감리교대회가 개최될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로 향했다. 대회는 5월1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됐다.
여기서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 자신의 영어교사였던 DW 노블박사를 만난다. 한동안 이승만은 노블에 대해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멀리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 노블은 이번 대회가 한국교회에 대해 꾸미고 있는 음모 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참석자들은 비난
그 음모의 골자는 한국 감리교회를 중국 감리교협의회와 통합하는 계획이었다. 한국 교회를 중국 측에 통합시킴으로써 일본의 지배를 면하자는 것이었는데 이승만은 한국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다. 다음은 그가 세계감리교대회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다.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데 있다.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국인을 지독히 탄압하고 있다. 그러니 세계의 기독교도는 모름지기 단결하여 이 피압박 민족을 하루바삐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며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유지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이를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한다. "
그러나 이런 내용의 연설은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참석자들로 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회의의 결론도 일본과 긴밀히 협조함으로써 한국과 일본 내의 선교사업을 보호한다는 기존의 선교방침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승만은 또 다시 진로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귀국을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남아 일을 도모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이 무렵 이승만은 서울의 언더우드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신분보장상의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 교수직을 구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조국을 위해 해야할 일 때문에 포기한다. (이는 각종 전기나 자료에 나와있는 언급인데 어쩌면 그가 교수직을 지원했으나 당시 미국대학의 백인 우월주의 분위기 때문에 교수로 채용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
이 때 만약에 이승만이 언더우드의 제의를 받아들여 연희전문학교의 교수가 되거나 미국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면 과연 우리의 역사는 현재와 같은 경로를 걸어왔을까. 이 무렵이 이승만으로서는 슬럼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뉴저지주 주지사로 민주당 대통령후보이던 은사 우드로 윌슨을 만나기 위해 그의 별장이 있는 시저트로 간다. 이승만이 윌슨을 만난 것은 6월19일이었다. 윌슨 면담과 관련해 이승만에 관한 일부 전기는 그가 도미한 원래 목적은 윌슨을 만나는데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별로 없다.
윌슨을 만난 이승만은 한국의 참상을 설명하고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알리는 성명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윌슨은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당신의 뜻에 동의한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를 위해 서명을 할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을 하며 "하지만 나는 모든 약소국을 위해 할 일을 생각중이다"고 밝혔다. 후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그것의 중요성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만남과 무관치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6월25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지명대회를 참관했다. 윌슨은 악전고투 끝에 겨우 후보로 지명을 받았다. 지명대회가 끝나자 이승만은 대학시절 자신의 여름 휴양지였던 뉴저지주 오션 그로브를 찾았다. 그러나 대학시절 그를 항상 따뜻하게 대해줬던 보이드 부인은 없었다. 보이드 부인은 그가 대학원을 마치던 무렵인 1908년 8월경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한국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함께 연날리기도 했던 이웃집 딸 에델 보이어는 중년이 된 1950년 이승만 전기를 쓴 올리버박사에게 학창시절의 이승만을 이렇게 중언한 적이 있다.
"29세에 그는 한국민의 독립이라는 일생의 목표를 정하여 활동적이며 힘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또 독립이라는 그의 목표는 국민생활의 물질적인 번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딘가 위엄이 풍기는 그의 기품엔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안면조차 없는 사람들까지도 은근히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
오션 그로브에서 이승만은 학창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후 워싱턴에 간 이승만은 다시 바쁘게 신앙간증을 겸한 강연을 열심히 하고 다녔다. 서명을 거부했던 윌슨도 "나 한사람의 서명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민들의 마음의 서명을 받도록 하시오"라고 강연회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강연은 과거처럼 한국독립에 관한 비중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던 것같다. 그의 11월18일자 워싱턴포스트지 회견내용을 보자.
"지난 3년동안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
신분불안 계속 느껴
이 말은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한국이 산업화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전형적으로 일본측의 논리이자 친일파의 논리다. 그러면 그가 왜 느닷없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일까. 그는 신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언더우드의 연희전문 교수 제의를 거절한 바 있다. 미국에서의 교수 취직은 여의치 못했다. 이때 이승만은 분명 갈림길에 섰다. 그로서는 이때 교수직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길은 연희전문의 교수가 되는 것인데 문제인물로 낙인찍혀 있는 것이 문제였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친일성향 인터뷰는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자신에 대한 일본측의 경계의식을 둔화시키지 않고서는 교수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일본을 떠날 때 해준 일본인 목사의 당부도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게 보자면 이때 이승만은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를 거치는 중이었는지 모른다. 올리버도 이 무렵의 이승만에 대해 "대학교수를 할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상당히 개연성있는 추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고민은 1913년 2월 옥중동지 박용만이 그를 하와이로 초청할 때까지는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 이승만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기 때문이다. 미국본토에 있던 박용만은 그 전해인 1912년 11월30일 한인단체인 하와이국민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가 신한국보 주필을 맡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곧장 하와이로 떠났다. 그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1913년 2월27일이었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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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