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철학박사가 아니다. 미국에서 흔히 박사를 칭할때 붙이는 PhD, 즉 Doctor of Philosophy에서 직역해 잘못 이해한 것이 아직도 그런 오해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법 박사다. 그것은 그가 다룬 논문이 바로 국제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구한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소위 만국공법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유지했다는 말이 된다.


그의 학위논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과거 박사학위가 너무나 드문 시절에 미국의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고 이승만의 카리스마 형성에도 큰 영향을 준 요인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무슨 내용으로 어떤 수준의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간혹 일부 식자들이 미국 등지에서 구해 읽는 정도였다.


국내학계에서도 이 논문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국제법 전공의 한국방송통신대 정인섭 교수가 학문적 차원에서 현재 번역을 진행 중인 정도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승만의 학위논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탈 신화화의 의미를 갖는다. 이승만은 생전에도 상당히 신비화 됐던 부분이 없지 않았다.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신비화된 면도 있고 (이승만 관련 전기물중 우남노선 과 같은 책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실제로 일반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을 수없이 해낸데서 그렇게 된 면도 있다. 그가 해낸 비범한 일들 중에는 1910년이라는 시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도 포함된다.



만국공법 관심 결실



신화는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탈 신화화된다.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차원에서도 그의 논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논문을 소상히 알 때 그 후 그가 보여준 국제정세에 대한 탁견과 정치행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정부론, 외교론, 국제법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쏟아왔다. 이 점은 그의 성적표에 나타난 수강과목들을 보더라도 쉽게 확인된다.


먼저 조지워싱턴대에서 그가 수강한 과목은 논리학, 영어, 미국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사회학, 서양사, 고대 어학 등이었다. 하버드대 석사과정에서는 헌법이 채택되기 전까지의 미국역사, 유트레히트 평화조약부터 현재까지의 유럽역사, 유럽 국가군의 팽창주의와 식민지정책에 관한 특별과목, 19세기 유럽의 상업 및 산업에 관한 과목 등을 배웠다. 그밖에 국제법과 중재론 및 미국외교정책을 공부했다.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배운 과목은 국제법, 외교론, 미국사, 철학사 등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국제정치상황을 국제법과 외교를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관심이 줄곧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논문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의 논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해상에서의 중립교역의 역사를 개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문 원제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혹은 중립론 이다.



영세중립론과 달라



논문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이 논문의 중립을 영세중립론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이승만의 논문에서 중립이란 오늘날과 같은 중립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상의 중립문제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립에 관한 이론을 다룬 것도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돼야할것이다.


우선 큰 목차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1장은 1776년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 중립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프러시아, 영국 등 해상무역의 강국들을 중심으로 중립교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전시나 해상 봉쇄시 상선의 법률적 지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2장은 1776년부터 1793년까지의 중립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사한 문제를 취급했다. 제3장은 1793년부터 1818년까지 중립의 역사로 크게 유럽과 미국의 사례로 나누어 중립교역에 관한 각국들의 법률적 조처를 정리하고 있다. 제4장은 1818년부터 1861년까지, 제5장은 1861년부터 1872년까지 중립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주제를 선정했으며 이 논문을 통해 다루려고 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그가 제6장 논문 요약에서 밝히고 있는 구절이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우리가 이제 이해하게 된 바와 같이 초창기 국제법의 역사에서는 중립이라는 개념조차 성립될 수 없었다. 중립에 관한 초보적인 형태의 개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로마제국이 점차 몰락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휴고 그로티우스를 위시해 국제법에 관한 초창기의 저술가들은 중립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들의 견해는 중립이 발전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중립에 관한 그들의 사상은 모호하고 불충분했다. "


그가 모호하고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지극히 전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상세히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한 요점은 국가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제교역의 자유가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전쟁 당사국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명백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저술가들은 이와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만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승만의 현실주의는 여기서도 확인된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받고난 뒤 윌슨총장이 베푼 리셉션장에서 윌슨에게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농담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윌슨의 질문에 그는 "공부를 하고 보니 국제법이란 사실상 강대국의 논리일 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동안 그런 것을 공부하라고 했으니 등록금을 돌려줘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는 것이다.



그의 논문은 이렇게 끝맺는다.



"유럽의 주요 해상열강들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세력들의 끈질긴 옹호에 힘입어 그 이전까지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중립교역의 성립에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


우선 논문의 학문적 성취는 교역상의 중립이 법률적으로 확립돼 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논증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도 한동안 중립교역 전문가로 불렸다.


물론 논문 어디에서도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가 하필이면 당시 일본의 속국이 되어가고 있던 조국의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중립 문제를 갖고 논문을 썼는지 그 이유는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청년기부터 열강들의 외교에 의해 유린당하는 한국의 처지를 보고 분개해온 그로서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한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을 것이고 그 중 하나로 우리가 중립국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당시 중립론은 그가 미국으로 가기 전 속해 있었던 개화파 일부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그의 논문 자체는 영세중립국이나 중립에 관한 이론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단지 교역상의 중립이라는 매우 전문화된 영역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 조국에 관한 문제의식이 없이 순전히 학문적 호기심만으로 중립문제를 연구했다는 것은 이승만의 전후 생애를 보더라도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아직까지 번역안돼



그의 학위논문은 국제법에 관한 논문이긴 하지만 그 성격상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도 결부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세 학과로부터 공동승인을 받은 특이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도 번역되지 않았다. 단순히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아는데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20세기 들어 한국인이 이룩한 몇 안되는 세계학문에의 기여인데도 말이다.


이 논문의 완성은 그의 생애 전체에서 본다면 실천을 위한 준비기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이만한 학문적 성취를 배경으로 갖고 있던 정치인이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얼마나 있을까.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무렵 우리 국력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큰 지도자로서 아시아나 미국 등지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그 개인의 역량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가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정부론, 국제법, 외교론 등은 어쩌면 정치인이 되는 소양으로서는 당시 최고의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형성된 국제적 안목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되는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