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탄 오하이오호는 1904년 11월5일 오후3시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쳤는데 11월8일 오후7시 부산항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밀사라는 사실이 들통나 배에서 끌어 내려질까 봐 줄곧 안절부절 못했다. 배가 부산항을 떠나자 이승만은 갑판으로 나와 명멸하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안쓰럽게 조국땅을 바라보았다. 외세의 간섭과 개입에 줄곧 시달리다가 결국 국권상실을 목전에 두게 된 나약한 나라 조선.
겨울 저녁 찬 바닷 바람을 맞으며 난간을 잡고선 29세의 청년 이승만의 머리 속은 처음 나선 해외여행인데다 밀사의 임무까지 띠고 있어 이런저런 걱정과 두려움으로 착잡했을 것이다. 공식적인 직함이나 지위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일본까지의 여비와 선교사 친구들이 써준 몇 장의 소개장 뿐이었다.
과연 미국땅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 어디서 누구를 만나야 할까 , 밀사역을 제대로 해낼까 등등 각종 불안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미 결정은 내려진 것이고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는 것만이 그 앞에 놓여져 있었다.
오하이오호는 순항을 계속해 시모노세키(하관)를 거쳐 11월 11일경 고베(신호)에 도착했다. 고베에서는 한국인 친구들과 로건 선교사가 환영을 나왔다. 이승만은 자신의 선교사 친구들이 로건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갖고 있었다.
11월13일 일요일 로건 선교사는 자신의 교회에서 이승만이 신앙간증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그 덕에 교인들의 기부금 출연으로 미국행 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연설을 해서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은 이승만이 이후에도 계속 이용한 자금마련 방법이었다.
선교사 곳곳 환영
11월 17일 이승만은 하와이행 시베리아호를 타고 고베항을 출발했다. 배삯은 일본돈 1백26엔(63달러)이었다. 이 배는 마침 하와이로 가는 한국인 이민들을 태우고 있었는데 이승만도 이들과 함께 3등선실에 탔다. 하와이 이민은 1903년 1월13일 첫이민 1백1명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래 급속히 늘어나 1903년 1천2백33명, 1904년 3천4백34명이 이민을 갔다.
이승만이 자신의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될 하와이의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은 11월29일이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3등선실의 선객에게는 일시상륙이 허가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상륙을 할 수 있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11월29일에 우리(여기서 우리란 자신과 이중혁을 말한다)는 호놀룰루에 도달했다. 배가 정박하자마자 다른 최하선실 손님들은 이민국 사무실로 끌려갔는데 나는 곧 상륙하게 되었다. 내가 상륙하러 준비하고 있을 때 미국 이민국의 한국 통역관인 홍정섭이 배에 올라와서 나를 마중해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와이에 있는 나의 친구들이 이틀 전에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각 지방에 통문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을 불러 그날 저녁에 회합을 갖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 부두에는 후일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여사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본 윤병구 전도사와 감리교 선교사인 존 와드맨 박사가 나와 있었다. 이원순씨의 전기 인간 이승만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은 다수의 교포들이 기다리고 있는 누아누 계곡에 가까이 있는 한국인 교회로 안내되었다. 그날 저녁에 일행은 호놀룰루로 부터 약 12마일 떨어진 예와라는 곳에 있는 한국인 농장을 방문했다. 거기에는 2백명 이상의 한국인이 모여 있었다. " 와드맨 박사가 주도한 예배가 끝난 뒤 이승만이 연설을 시작했다. 이날의 연설은 신앙간증 겸 시국강연이었을 것이다.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이승만이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와드맨 박사의 주의가 있고 나서야 밤 11시경 끝났다고 한다. 서정주씨의 전기는 이 때의 분위기를 "동포들은 그의 연설에 흥분하여 어떤 때는 소리를 같이 하여 고함을 치고 어떤 때는 나직하나 뼈에 사무치는 소리로 울었다"고 적고 있다.
예배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이승만의 선창으로 애국가를 합창하고 끝났다.
밤새워 구국토론
이승만은 이날 밤을 윤병구 전도사의 집에서 지냈다. 이들은 밤새워 조국의 독립에 관해 이야기한 끝에 "윤전도사는 당분간 하와이에 머물며 자금 갹출과 교포들의 완전단결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는 한편 이승만씨는 워싱턴으로 가서 최선을 다할 것을 결정했다. "(이원순씨의 인간 이승만 ). 밤을 꼬박 샌 두 사람은 새벽녘에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거기서 이승만은 다른 교회 집회에서 연설을 해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데 필요한 시베리아호의 운임 30달러를 마련했다. 시베리아호는 11월30일 오전11시30분 출발했다. 이승만은 난간에 서서 부두에서 모자와 손수건을 흔드는 교포들과 작별했다.
시베리아호는 엿새의 항해 끝에 12월6일 오전 10시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안정수가 마중을 나왔다. 안정수는 윤병구 전도사와 함께 1903년 8월 하와이의 반일단체인 신민회(1904년 4월 내분으로 해체됐다)를 조직했던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이 무렵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었다.
이승만으로서는 미국 본토를 처음 본 것이다. 이승만은 1906년 4월21일 워싱턴 YMCA에서 강연을 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저의 기분은 한국 표현을 빌린다면 촌계관청 격이었습니다"고 토로했다. 촌닭 그 자체였던 것이다.
도착한 첫날의 인상은 아니지만 미국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이승만은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가 1905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첫인상 중에 그 후에도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나라와 미국과의 대조이다. 물질적인 진보, 현대적 발명, 고층건물 등등 그런 따위의 대조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싼 인명과 노동력이 미국에서는 가장 비싸다는 것이다. "
이승만은 이중혁, 안정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북쪽 산 라파엘에 사는 피시부부를 찾아갔다. 그들의 아들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 있었다. 피시부부는 이승만과 이중혁을 다음날 샌 안셀모 신학교에 데리고 갔다. 학장 매킨토시 박사는 두 사람에게 각각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합쳐 매달 3백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하겠으며 3년간의 공부를 끝마치면 한국에 선교사로 보내주겠다고 제의했다.
이승만은 넓은 언덕위에 치솟아 있는 아름다운 석조건물을 바라보면서 강한 유혹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로서는 신앙의 길을 걸으며 편안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불안과 위험으로 가득찬 구국의 길을 걸을 것인지 기로에 선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러한 후의에 대단한 유혹을 느꼈고 매킨토시박사는 내가 그곳에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설득을 했지만 나는 나의 비밀사명을 수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승만의 거절에 대해 피시부부와 매킨토시 박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이 밀사의 사명을 수행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는 초라한 동양인에 대해 불쾌한 감정까지 들었을 것이다.
신학교 제의 거절
"이와 같은 오해는 그의 생애를 통해 수없이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쓰라린 일 중의 하나였다. "(이원순의 전기) 다행히 이승만의 결정에 이중혁도 따랐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은 학계 일부에서 제기하는 "이승만 밀사설은 거짓이다"는 주장이다. 만일 이승만이 단순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갔다면 하와이에서 본토로 올 이유도 분명치 못하거니와 매킨토시박사의 제안을 거부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이승만과 이중혁은 며칠동안 샌프란시스코의 이곳 저곳을 관광한 다음 12월17일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그곳에서는 서당친구이자 배재학당 동문인 신흥우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신흥우는 이승만보다 8살 아래이면서도 신학문과 기독교 입문, 도미유학 등 모든 면에서 이승만 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때도 그는 이미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일주일간 머물고 12월26일 산타페 철도편으로 워싱턴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두 장의 표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중혁은 로스앤젤레스에 그냥 남았다.
30일 오전 9시 시카고에 도착해 서울의 언더우드 박사가 보낸 편지를 미징거 박사에게 전달하고 오후 3시 시카고를 출발해 피츠버그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12월31일 오후 7시였다. 서울을 떠난지 꼬박 56일만이었다.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