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6월5일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이승만은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당초의 목표대로 귀국해 기독교 교육에 힘쓰는 한편 국민계몽 활동을 다시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미진하다고 생각되는 서양 학문을 좀 더 공부한 다음에 귀국할 것인지였다.



부친이 귀국만류



이 무렵 부친은 너의 정치활동과 견해가 일본 관헌을 노하게 했기 때문에 당분간 귀국을 않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당장 귀국한다고 해서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 계속 남으려해도 생계 문제가 걱정이었다. 그를 지원해 준 감리교 선교부의 귀국 종용도 부담스러웠다. 감리교측은 이제 이승만이 귀국해 한국 선교의 모범 사례 로 현지 전도사로 활동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결심 과정에 특별한 사건이 동기로 작용했던 것같지는 않다. 대학 공부를 하고나니 서양학문이 생각보다 깊고 넓어서 좀 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이 이 무렵 상당히 초조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06년 12월부터 1907년 1월 사이에 그가 하버드대 관계자들과 주고받은 여러차례의 서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이승만이 하버드대 측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주로 우리나라의 사정이 급박하니 바로 박사과정에 입학을 허락해 준다면 2년 만에 학위를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실패하고 결국은 1907년 9월 하버드대 석사과정으로 입학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도 지방신문 에스베리 파크지와 뉴욕 모닝 포스트지에는 이승만 인터뷰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언론을 이용한 한국 독립 호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한국인은 개인으로서는 결코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열강국은 일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해서 극동에 있어서의 상업상의 권익이 방해될 것을 우려하고 한 마디도 정의에 입각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전체가 일본에 독점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런 식의 적당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


이승만이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천 애드버케이트지 AB 레너드 주필에게 그가 항의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레너드 주필은 친일인사로 동양을 여행하던 중 한국을 며칠 방문하고 온 뒤 이승만이 항의편지를 보내기 얼마전 뉴욕의 오션 그로브 강당에서 "일본은 지금 한국을 개혁하고 있으며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통치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연설을 했고 이를 안 이승만이 즉각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할 수 있었던 항일운동의 주요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친일성향의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항의와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인을 상대로 한 이승만의 논리는 치밀하고 일관된 것이었다. 뉴욕 모닝 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밝힌 대로 일본을 방치해 둘 경우 서방의 친구가 되기 보다는 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억압 하에 있는 한국을 독립시킴으로써 견제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 는 것이었다. 이같은 논리는 아주 일찍부터 갖고 있었고 죽는 그날까지 그대로 견지했던 그의 극동관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제 신학보다는 세계정세와 서구문화의 역사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어를 배워 서양책을 번역하겠다던 대학시절의 포부는 바뀌어 서양 문물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하는 쪽으로 관심이 기운 것이다. 이는 그가 대학원 시절 수강했던 과목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석사 1년에 끝내



"그가 선택한 학과에는 헌법이 채택되기 전까지의 미국 역사, 유트레히트 평화조약부터 현재까지의 유럽역사, 유럽 국가군의 팽창주의와 식민지 정책에 관한 특별과목 등과 경제학 방면에 있어서는 19세기 유럽의 상업 및 산업에 관한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그는 국제법과 중재론 및 미국외교정책을 배웠다. "(이원순씨의 전기 인간 이승만 )


그러나 그의 성적은 대학 때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대부분 B나 C 학점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은 아닌 듯하다. 우선 석사과정을 1년만에 끝냈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당시 미국 대학의 교육이 철저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성적만으로 그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고 판단을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실제로 각종 전기나 자료를 보더라도 석사과정 때 이승만은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동양적인 지식배경을 가진 학생으로서는 이런 학과는 거의 새로운 것이었으며 이것을 숙달하기 위해서는 밤중까지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 재학중에는 연설도 중지하고 학우와의 새로운 우정도 맺지 않고 대학의 사교생활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원순씨의 전기 인간 이승만 )


1908년 1월1일 박용만, 이관용등이 주동이 돼 같은 해 여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애국동지 대표자 대회를 열기로 발의한 것을 보아 이 행사와 관계된 여행이었던 것같다.


애국동지 대표자 대회는 사분오열돼 있던 교민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회는 발의한 대로 7월11일부터 15일까지 덴버시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모두 36명으로 미국 각 지역과 하와이,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런던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위임 대표들이었다. 이 행사에서 결의한  사항들은 그 지역신문인 덴버 리퍼블리칸지에 보도됐는데 주요 내용은 재외한인단체들의 통합, 양서의 한문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 설립, 세계정세에 관한 서적의 한국 배포 등이었다.


스탠퍼드대 데이비드 스타 조던 총장이 개회사를 맡았던 이 행사에서 이승만은 박용만의 지원을 받아 의장으로 선출됐다. 여기에는 그의 과거 경력과 하버드대를 다니고 있다는 점이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폐회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현재 정치인들은 한국이 일본과 싸워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의 희망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적 특징과 민족적 특성을 연구해 본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뛰어난 데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4천년 이상 민족의 특성과 완전한 독립을 보존해왔으며 어떠한 국가도 결코 지구에서 말살되지는 않을 것이다. "


민족의 장래에 대한 낙관론은 이승만사상의 근저에 언제나 깔려 있었다. 교육과 계몽에 그처럼 집착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낙관론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절 그는 교민사회에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그 발단은 스티븐스 암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온 후 다시 학업에 몰두하던 1908년 3월23일에 일어났다. 공립협회 소속의 장인환 의사와 보국회원 전명운 의사가 공교롭게도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었던 친일인사 DW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역에서 사살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교포와 국내 인사들의 지지는 열화와 같았다.


재판이 시작되자 공립협회와 보국회는 힘을 모아 네이던 코글턴, 존 배럿, 로버트 페럴 등 3명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문제는 통역이었다. 미국 한인의 실상을 소상히 전달하고 있는 김원용씨의 재미한인 50년사 를 보자.


"이때 한인 중에 영어하는 사람이 귀해서 통역이 곤란하던 까닭에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을 통역으로 청하였다. 이승만은 7월16일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관계로 오래 있을 수가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이것만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그의 처사가 올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친일인사를 처단한 것에 대해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승만은 어떤 생각에서 통역요청을 거절했을까. 그의 자서전의 한 구절이다.



한인사회 불만산듯



"그리고 그 겨울에 2명의 한국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 앞에서 사살했고 바로 그 전에 한국의 애국지사 안중근이 시베리아의 하얼빈에서 일본의 거물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했다.


스티븐스는 어버린 대학의 졸업생이었고 미국에서는 퍽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 청년 이승만 자서전 )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 이승만은 잇따른 암살사건이 한국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식을 흐리게 하고 결국은 한국의 독립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다소 답답해 보이면서도 지극히 서구적인 가치 기준에 입각한 이승만의 이같은 사태 인식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승만은 두 사람에 대한 변호통역 제의를 단호히 거절한다. 여기에서 기독교인이라든가 동부에 사는 그로서 서부에 수시로 와서 통역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부차적 요인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에 암살은 그 명분이 어떠하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이런 엉거주춤한 태도에 대해 한인사회의 불만은 높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올바르다고 믿었다. 그가 오랜 정치역정에서 받게 되는 비판이나 오해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일보, 이한우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