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내막기"를 출간한 때 마침 발발한 진주만 폭격으로 자신에 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가던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이승만의 활동은 어떠했던가.


그가 책을 출판하던 무렵인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미주의 국민회, 동지회, 대조선독립단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재미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세계가 점차 대전 국면으로 가던 상황에서 더 이상 한인들이 분열된 상태로 갈등만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시대적 요구가 이들로 하여금 오랜만에 다시 뭉치게 했던 것이다.


발족대회에서는 첫째 임시정부 지지, 둘째 워싱턴에 외교위원부 설치, 셋째 독립금을 갹출해 3분의 2를 임정에, 나머지는 외교위원부에 송금할 것 등을 결의하고 위원장은 이승만의 측근인 임병직이 선출됐다.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은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됐다.



한인신분증 발행케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는 본부를 호놀룰루에, 이사회를 로스앤젤레스에 두고 국문과 영문으로 된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한국독립에 대한 한국민의 호소를 미국내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진주만 폭격 이후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하와이에 급속한 배일감정이 확산됐을 때 한국인에게는 따로 신분증을 발행해 일본인으로 취급 당하지 않도록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는 이승만의 대미 외교활동이 거둔 가장 중요한 가시적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의 외교위원장 선출은 1933년 국제연맹에 독립호소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활동을 벌인 이후 8년 만에 공식적으로 항일 독립외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준 것이었다. 물론 이승만은 공식적 지위 의 필요상 이를 받아들인다. 동시에 기능 정지 상태에 있던 구미위원부의 활동도 재개했다.


그러나 그는 애당초 연합위원회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특히 지방색으로 인한 지지 노선의 차이가 큰 문제였다. 1910년대 부터 시작된 한인사회의 지방색은 크게 이북 출신들과 이남 출신들 사이에 나타났고 각각의 출신들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  이승만은 주로 서울 경기와 충청도 등 기호 지방 출신들의 지지를 받았고, 동지회에도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독립운동 노선도 이남 출신들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는 편이었고, 이북 출신들은 지리적으로 중국이나 소련 땅과 가까운 때문인지 무장투쟁노선을 선호했다.   20년대의 무장투쟁론자 박용만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래서 이승만은 연합위원회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단체로 생각지 않았다. 결국 1943년이 되면 그의 지지단체인 동지회는 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고만다.


어쨌든 1941년 4월 그에게 외교위원장이란 직함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승만으로서는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대미외교를 전개할 수 있는 신분적-물질적 기반이 제공된 셈이었다.



대일 선전포고 전달



이승만은 즉각 중경의 임시정부로 연락해 신임장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6월 4일자로 이승만은 임정에 의해 워싱턴 전권대사의 자격을 인정받아 대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로써 사실상 구미위원부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승만은 12월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3일 후인 11일 임정의 대일 선전포고를 미 국무부에 전달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해가 바뀌어 1942년 2월27일 워싱턴 라파예트 호텔에서는 각 단체대표 1백여명과 미국의 저명인사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미 한족대회가 열렸다.  세계전쟁의 격화와 함께 한국의 독립 기운이 점점 높아가는 시점에서 재미 한인들의 단결심을 높이고 미국 시민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행사였다. 여기서 이승만은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개회사를 했고 이틀 후인 3월1일에는 1919년 독립선언 기념일 행사를 주도했다.


그리고 6월부터 이승만은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단파방송 미국의 소리(VOA) 를 통해 특유의 떨림이 강한 목소리로 단결을 촉구하고 반일자세를 잃지 말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내보냈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인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전문을 싣는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해외에 산재한 우리 2천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든지 내 말을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들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들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천3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슬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희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여 여러 천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가지 관계로 하여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여 온 세상이 다 저의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여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여러 장군의 지휘 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 방으로 왜적과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관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 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여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쿠바와 멕시코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 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전 남의 나라 영지에 숨어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전할 것입니다.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우리나라와 서백리아(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를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이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 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여 저의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역사상 한두번이 아니었나니 우리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 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여 숨겨 두었다가 내외에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터이니 그 때에는 일시에 일어나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을 일제히 함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피흘려야"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미국 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며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 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어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하여 준행하시오. 일 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이 때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3백만 동포들이여. "


이 방송내용은 몇 주일 동안 매일 반복해서 방송되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이 방송을 들은 사람은 국내에 얼마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통치가 극에 달했던 1942년이라는 시점에서 우연히라도 이 방송을 들은 한국인들은 얼마나 가슴벅찬 감격을 느꼈을 것인가.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